# '땅! 땅!' 돌길에 부딪히는 스틱 소리에 눈을 떴다.
창문을 빼꼼 열었더니 문틈으로 찬 새벽 공기가 훅 들어온다.
바깥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려 돌로 된 건물과 길이 모두 회색이다.
거리가 참 과묵해보인다.
어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순례자들이 스틱을 힘차게 짚으며 성당을 향해 가고 있었다.
# 오늘은 피스테라 가는 날이다:)
모처럼 느긋하게 체크아웃을 하고
버스정류장으로 가 10시 출발하는 표를 끊었다.
왕복표를 끊으니 기분이 좀 이상하다.
계속 앞으로만 왔지 뒤로 되돌아가긴 처음이라 그런가보다.
짐을 짊어지고 플랫폼 의자에 앉았다.
조금 있으려니 한 순례자가 와서 인사를 건넨다.
왠지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다. 이 몹쓸 기억력..
머리 길어 예수같이 생긴 이 청년은
우리가 아르주아 알베르게에서 같이 묵었다고 한다.
그래도 모르겠다.
"너 내 옆 침대 2층에서 잤잖아~"
헉;;;; 그제서야 키가 몹시 큰 사람과 잠깐 인사했던 게 생각났다.
독일에서 왔다는 이 친구는
레온에서부터 일주일 정도 걸었는데 발이 너무 아프다고 엄살이다.
여기저기 물집이 잡혀서 도저히 피스테라까지 걸어서 못 가겠단다.
키는 190도 넘어보이는고만-.-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노란책을 꺼낸다.
새 책인데 지퍼백으로 고이고이 싸 두었다;;
"이따가 버스를 타면 꼭 왼쪽에 앉아야 한대."
"왜?"
"왼쪽으로 바닷가가 보여서 경치가 완전 좋대~ 여기 이렇게 쓰여있어."
그 밖에도 괜찮은 호텔이 25유로 선이라는 둥,
등대가 보이는 곳까지 5km정도를 가야 한다는 둥
까미노 정보원인 독일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버스를 탔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멀미가 시작된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버스가 원망스럽다.
일정만 되면 그냥 내려서 걷고 싶었다.
그냥 자기로 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2시간을 곯아 떨어졌다.
눈을 뜨니 왼편에 해안가가 쫙 펼쳐진다.
오랜만에 보는 playa가 낯설면서도 반갑다.
3시간을 내리 달려 드디어 도착한 피스테라.
거의 뛰어내리다시피 했다.
우웩- 다시 버스타고 여길 오나봐라ㅠ
멀미가 극에 달해 진정이 안 되는데
이건 뭐;; 비바람이 몰아친다. 날도 참 잘 잡았다.
정신없는 와중에 아줌마 아저씨들이 숙소 광고지를 막 나눠준다.
어차피 버스를 타고 오면 공립알베르게에서 묵지 못하기 때문에
비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결정해야 했다.
여기서 하나를 찍어 믿고 가는 수밖에.
그 중 가깝고 깨끗해보이는 펜션 하나를 골랐다.
광고지 주신 아주머니를 따라 다른 순례자 5명과 함께 그 숙소로 향했다.
# 헝가리에서 온 순례자 한 분의 도움으로 통역을 받아
이 곳에 대한 정보를 듣고 안내에 따라 2층 방에 짐을 풀었다.
좀 춥긴 하지만 깨끗하고 괜찮은 것 같다.
같은 층에 묵게 된 친구들은 깔끔한 주방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야단이다.
내년에 대학에 진학한다는 4명의 어린 친구들은 프랑스길을 걷다가 만나 동행했단다.
둘은 독일인이고 나머지 둘은 스페인인이다.
10대들답게 내가 만난 역대 순례자들 중 가장 밝고 정신없었다;;
같이 점심 먹는데 피자와 샹그리아 들고 춤추고 난리도 아니었다.
따뜻한 수프를 끓여먹고 조금 쉬고 있으려니 멀미가 어느 정도 가셨다.
피스테라에 올라가려면 3km정도는 걸어야 해서
따뜻하게 걸칠 옷가지와 카메라를 챙겨 길을 나섰다.
# 노란 화살표도 오랜만인 것 같다. 그래봤자 머 이틀만이지만;;
완만한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니 바람도 거세지고 구름 및 안개가 잔뜩 끼여있다.
바람을 헤치며 가는 듯한 순례자 동상이
꼭 내 모습 같아 한 컷 찍고-
까미노 걷듯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딛었다.
# 드디어 '땅의 끝'을 알리는 가리비 표석이 나타났다.
0.00km라고 쓰인 것을 보니 다 왔다는게 이제야 실감이 난다.
까보 피스테라(Cabo Fisterra).
지구가 네모날 것이라 생각하던 고대 유럽인들이
이 곳을 땅의 끝이라고 여기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록 산티아고에서 걸어오지는 못했지만,
육지의 끝과 만난 바다가 보이자 비로소 해냈다는 느낌이 든다.
# 앞으로 걸어가니 바다가 눈 앞에 펼쳐졌다.
조금 전까지 구름이 잔뜩 끼어있던 하늘도 거짓말처럼 개었다.
아주 조금씩 걷히더니 햇살이 쫙 비친다.
반짝반짝 빛나는 바닷물이 너무나 아름답다.
# 등대처럼 생긴 구조물을 본 순간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났다.
순례자들이 남기고 간 운동화와 옷가지, 갖가지 국기와 소지품들이
바람에 펄럭펄럭 휘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까미노를 마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그간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과 지나온 마을 풍경들이 생각났다.
내겐 산티아고보다 더 감동적인 '마지막 여정'이다.
# 지금 생각하니 그 때의 감정을 표현하려해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근데 한 없이 벅찼던 그 날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일기장엔 이렇게 남겼다.
-'감사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화창한 날씨, 올바른 길을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그렇게, 계속 되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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