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Camino de Santiago-del Norte

#33. 마지막 북쪽길을 대하는 자세(Sobrado-Arzua : 22.35km)

yurinamu 2010. 10. 29. 12:30

 

 

 

# 6시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오늘 7시 반 미사를 꼭 보러 가야했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배낭과 스틱을 챙겨 나왔더니

바깥이 아직 어슴푸레하고 수도원 안도 제법 쌀쌀하다.

시몬과 파스칼은 미사 보는 곳을 못 찾았다며 그냥 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은 찾아보고 가야겠다 싶어,

유일하게 불빛이 새어나오는 돌문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신전의 비밀의 문으로 들어온 듯 고요하다. 

내 발자국 소리만 쿵 쿵 울릴 뿐이다.  

 

온통 깜깜한 가운데

영화 세트장 같은 미로가 나오고 양쪽에는 나선형의 돌계단이 보였다.

영화 <해리포터>의 스네이프 교수 그림자가 불쑥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다.  

손잡이를 손으로 더듬으며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갔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다 휴대폰을 보니 벌써 7시 32분이다.

찾다가 더 늦어서 공연히 폐끼치는 게 아닌가 싶어 멈칫했는데

어디선가 희미하게 노랫소리가 들린다.

 

노랫소리를 따라가니

저쪽 한켠에 순례자들의 것으로 보이는 배낭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갔다.

'와.........'

속으로 탄성이 절로 나왔다.

 

신전 같은 내부에는 신부님 열 다섯분 정도가 돌로 된 원탁을 중심으로 빙 둘러서 앉아계셨다.

마주보고 서 계시는 신부님 두 분이 미사를 보시고 성가도 부르셨다.

그 가운데엔 한국인 신부님도 보였다.

여러 나라에서 오신 듯한 신부님들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미사에 임하시고

나를 비롯한 몇몇 신자들은 숨죽이며 의자에 앉아

마치 한 거룩한 의식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는 그런 느낌이었다. 

정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도원에서 하는 미사라 그런지 더 엄숙하고 경건했다.

노래도 많이 부르고 형식도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성찬 전례는 신부님 세 분께서 원탁 가운데에 나오신 후 성체를 받드셨다.

천정에서 반사된 빛 때문인지 반짝반짝 빛났다.

성체를 영할 때는 신부님들께서 나오셔서 빵과 포도주를 쪼개어 나누어 주셨다.

 

간절히 기도하고 눈물날 만큼 마음을 다했던지라

어제의 불만과 아쉬움이 어느덧 가시고 감사한 마음만 남았다.

눈을 뜨니 다른 순례자들과 신자들 모두 같은 마음이었는지 눈시울이 붉어져 있다.

미사가 끝나고 마음이 깨끗하게 비워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배낭을 메고 문을 나서는데 프랑스인 할아버지와 스페인인 아줌마도 나오신다. 

아줌마는 볼에 뽀뽀하시더니 꼭 안아 배낭 멘 어깨를 다독여주신다.

"까미노 부디 잘 하거라...우리 딸"

스페인인 엄마 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평소 잘 웃지 않으시는데다 스페인어만 할 줄 하셔서

프랑스인 할아버지를 뵐 때 함께 짧은 인사만 나누었던 터다.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감사하기도 했다. 

 

나 뿐만 아니라 모두들 미사로 마음이 따뜻해진 것 같다.

오늘 여기 온 것만으로도 참 많이 배우고 비우고 나눌 수 있어 감사했다.

수도원에서의 아침 미사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 오늘은 프랑스길과 합쳐지는 아르주아로 간다.

아침에 미사를 보고 길을 나서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여유롭게,  조금씩, 즐기면서 가기로.

산티아고도 그렇지만 북쪽길이 얼마남지 않았기에 서두르지 않기 위해서다.

 

어제와 달리 날씨가 화창하다.

초반에 9km까지 쉬지않고 갔는데 힘이 부쳐 바에 들렀다.

쉬엄쉬엄 갔는데 평소와 달리 버겁다. 카페인이 부족하단 뜻이다.

마침 바에서 나오는 시몬과 파스칼을 만났는데 내 얼굴을 보더니 무슨 일이냔다ㅋ

둘다 내가 앞서 간줄 알았는데 뒤늦게 나타나 적잖이 놀란 눈치다.

아침에 노랫소리를 따라가 미사보는 곳을 겨우 찾았다고 얘기했더니

너무 좋았겠다며 일찍 떠난 것을 아쉬워했다.

아르주아에서 보기로 하고 헤어진 뒤 테라스에 앉아

멜리데로 향하는 갈림길을 보며 커피 한 잔을 마셨다.

 

 

  

 

# 6.6km정도를 더 갔다. 비교적 완만한 길이다.

까미노 프란세스에 가까워질수록 경사도 급하지 않고 험한 산길도 줄어드는 느낌이다.

 

중간에 폴란드에서 온 라파엘 신부님과 모녀를 만났다.

사실 어제 수도원 미사에서도 만났는데 소브라도 주민인 줄 알았더니만, 같은 순례자였다.

모녀는 금발머리를 양 갈래로 가지런히 땋아 내려 희고 고운 얼굴이 더 돋보인다.

언니와 동생으로 오해했을만큼 어려보이고 다정한 모녀가 참 보기 좋다. 

수사복 차림의 수염이 덥수룩한 신부님은 모녀보다 더 호들갑스럽게 말씀하신다. 

"이 어깨로 배낭을 지고 왔단 말이야? 이룬에서?"

'나 정도는 되야지' 하며 배낭을 들쳐매는데 기우뚱한다. 

신부님의 몸개그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동행하며 천천히 소풍하듯 걸었다.

과수원에서 아주머니께서 한 아름 주신 사과도 나눠먹고 길가에 핀 무화과와 애플민트도 구경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과일나무나 허브가 지척에 깔려있으니 너무 신기했다.

지난 번에는 어느 집 정원 안에 심어진 레몬나무를 보고 뿅~반했다.

짙은 녹색 잎파리 사이로 주먹만한 노란색 레몬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는데 햇빛에 반사돼 더 반짝반짝 빛났다.

저런 탐스런 레몬나무 하나면 크리스마스트리도 부럽지 않을 것 같았다. 

 

 

 

 

 

# 마지막 7.4km 구간을 남겨두고는 밀밭이 넓게 펼쳐졌다.

완만한 길을 지나 경사로를 오르는데 저 위에 누가 보인다.

지난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독일인 친구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쓰러질 것 같아 생수 한 통을 건넸더니

미안한지 채 다 마시지도 못하고 웃어보인다.

물도 마침 떨어지고 너무 발이 아파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고 했다.

발이 퉁퉁 부르터서 양말이 거의 발에 달라붙다시피했다.

아침에 진통제를 3알이나 먹었는데 약기운이 떨어진 것 같다며 아스피린이 있냐고 묻는다.

진통제를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어진다는 걸 알고 말렸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스틱을 짚고도 비틀비틀거리며 힘겨워했다.

'여긴 중간에 바도 하나 없는데...'

가방에 하나 남아있던 오렌지주스를 주었더니 너무 고마워한다. 그리곤 원샷-

 

별로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아르주아 표지판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난 프랑스길부터는 정보가 전무한지라 아르주아에 있는 알베르게를 혹시 아냐고 물었다.

갑자기 노란책을 펴서는 알베르게 7개의 위치와 가격, 시설 등을 읊어주기 시작;;

고르기 어려우니 어느 한 개만 얘기해달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이 친구가 독일에서 왔다는 걸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 헤매다 아르주아에 도착.

갑자기 마을이 커지고 도로가 넓어지는 것 같더니

배낭 멘 사람들이 부쩍 많이 보인다. 낯설고 놀랍다.

알베르게에 가까워지니 사람들이 줄을 지어서 간다;;;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이 고요하던 북쪽길과는 너무도 다르다.

 

당황스러웠던 건 알베르게를 찾으면서도 마찬가지.

공립알베르게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3개의 알베르게까지 꽉 찼단다.

 

대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프랑스길을 선택하지 않았던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4곳을 돌아다닌 끝에 아르주아 끄트머리에 있는 한 알베르게를 소개받아 그 쪽으로 갔다.

새로 지어진 곳인듯 깨끗하긴 한데 비싸고 주방도 없어서 사람들이 몇 명 없었다.

오늘 길을 알차게 걸은 데 만족하기로 하고 짐을 풀었다.

여기서 숨고르기를 하고 하루 뒤에 떠날까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