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Camino de Santiago-del Norte

#29. 별책부록 4km(Gontan-Vilalba : 20.81km±4km)

yurinamu 2010. 10. 26. 16:21

 

 

# 아침도 주방은 붐볐다.

차 끓이고, 파스타 만들고, 빵 썰고, 저마다 분주하다.

어제 타바코에는 실온용 요거트 한 가지만 있어 샀는데 오히려 이게 편하고 좋은 것 같다.

 

아침식사용으로 갖고 다니는 무슬리를 요거트통에 조금 덜었다.

잠시 뒀다 불려서는 냠냠 먹고 있는데 주방에서 치익-하고 타는 소리가 난다.

누가 냄비 올리고 잠시 자리를 비운 새 물이 넘쳐버렸다.

뚜껑 열고 불을 약하게 조절해 놓은 뒤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코펠을 갖고 다니며 아침에 차와 파스타까지 챙겨먹다니, 대단하군.'

잠시 후 주인으로 보이는 머리 긴 청년이 룰루랄라 내려온다.

"네 냄비 말야, 물 넘쳤어~"

표정이 완전 헉;;이다.

뭐라 얘기해주기도 전에 주방에 뛰어들어가더니

안정을 되찾은 냄비를 보곤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너무 고맙다고 한다.

독일인인 줄 알았는데 벨라루스에서 왔단다.

낯선 나라여서 그런지 얼른 와 닿진 않지만 한편으론 신기하다.

네가 처음 본 벨라루스인이라 했더니 여기서 만난 유럽 사람들도 그렇게 얘기한단다ㅋ

 

얘기하며 요거트를 2개째 먹고 있는데 샤방남이 부스스한 얼굴로 내려와서는 인사한다.

뒤에 오던 선글라스남은 오늘도 역시 까칠한 표정으로 눈인사를 한다.

마치 어제같은 상황이 또 다시 펼쳐진다.

샤방남은 뭐 먹나 자꾸 묻고 쳐다본다. 참 독특한 관심사다.

"이거 내추럴 요거트야?

어제 타바코에서 너도 샀구나~ 나도 여기 있어히힛-

무슬리랑 같이 먹는구나, 좋은데?"

뭐 이런 식. 어쨌든 과한 관심 속에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 나간 지 10분도 안 되어 길을 잃는 짓을 할 뻔 했으나

뒤따라오던 독일 친구들 2명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나를 불러 세워줬다.

덕분에 다시 겨우 방향을 잡고 걸어갔다.

그 후로도 자꾸 뒤를 돌아보며 코너가 나올 때마다 기다렸다 알려준다.

'길 찾는 것 만큼은 참 여러군데서 민폐를 끼치는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미안해진다.

 

 

 

 

 

# 속력을 내 산길을 걸었는데 오르막 내리막이 그리 험준하지 않았다.

그늘이 많아 어제의 차도에 비하면 아주 걸을 만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도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쭉쭉 걸었더니 어느덧 6.4km지점.

다음 마을에서 바에 들르기로 하고 중간 중간 쉬는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계속 길을 갔다.

 

그런데 그 이후론 어떻게 앉을 벤치 하나 없는지;; 그 흔하던 바도 없다.

우거진 숲 안에 Ponte Villa라고 만들어 놓은 벤치를 발견했지만

워낙 나무가 우거진 곳에 만들어 놓은 거라 지저분하고 화장실이 급해 그냥 일어섰다.

조금만 더 가면 마을에 바가 있다고 했는데 소만 나오고 농장과 스러져가는 시골집만 보인다.

심지어 이렇게 낡은 집은 여태 못 봤는데;;

지나오는 동안 들른 시골 마을은 시골이 아니란 생각이 들만큼 집이 모두 깨끗하고 예뻤기 때문이다.

 

 

 

 

 

# 조금만, 조금만 더 가자 하며 힘을 냈다.

점심 때가 다 됐는데 한 번도 제대로 쉬지 않고 비스켓 하나 먹고 가려니 어질하다.

다음 마을에 바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기필코 찾으리라 다짐하며 발을 질질 끌고 걸었다.

 

5km 정도를 더 걸어 마을 발견! 그런데 바가 안 보인다.

여길 벗어나면 5km는 더 쉼없이 가야하는지라 촉을 세우곤 감으로 '바 찾기'에 돌입했다.

까미노 루트가 마을을 점점 벗어나는 것 같아 화살표를 이탈해 차도 쪽으로 돌아갔다.

과연 큰 레스토랑과 바가 나왔다 훗-

몬도네도에서 만난 빨간머리 여자가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나를 보곤 인사한다.

자긴 7시 반에 나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걸었냐며 놀라워한다.

중간에 한 번도 쉬지 못했다고 하니 더 놀란다.

나도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하하하;;

카페콘레체를 그란데(Grande) 사이즈로 주문해서 카페인 폭풍섭취!

좀 정신이 든다. 세요까지 받고는 독일인 시몬과 같이 일어났다.

 

사회복지사인 그녀는 미래,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이 길을 택했다고 한다.

독일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거의 반반이라는 헤닝의 말이 떠올라 종교를 물었더니 역시 프로테스탄트란다.

종교나 취향, 걸어온 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중간중간에도

특유의 독일인 기질을 발휘해 전방 몇km가 남았는지를 보고해준다.

 

1시간이 채 안 걸려 도착!

가장 최근에 지은 갤러리 같은 느낌의 어두운 색 건물이 오늘의 알베르게다.

주방에 식기와 팬이 없고 욕실은 구분되어 있으며, 장을 보려면 약 2km 떨어진 비랄바 중심가로 걸어가야 한다는

시몬의 브리핑을 듣고 나니 인포센터에 갈 필요가 없어졌다.

 

 

 

 

 

 

# 한국에서 얻어간 정보라곤 앞서 다녀온 분이 카페에 남겨주신 기록, 달랑 하나였다.

그마저도 빠진 부분이 더러 있어 중간 중간 다니며 보충해야했다.

마을 초입에 보이는 짙은 회색 건물이 알베르게인데 오후 1시부터 연다.

갈리시아 지방 알베르게의 장점은 문을 빨리 여는 것, 일회용 시트를 주는 것.

베드버그 노이로제에 걸린 나 같은 사람에겐 특히나 고마운 아이템이다.

주방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꽤 많이 있지만 팬도 없고 냄비도 없고 식기도 없다. 

다들 주방을 보고는 외쳤다. "이건 사기야!!"ㅋㅋ

침실은 3층에 있고 두 개의 큰 방으로 분리되어 있다.

깔끔한 편이나 침대가 많아 지나다니기에는 조금 비좁은 감이 있다.

창문 쪽으로 나 있는 테라스에서 마을을 내다볼 수 있고 빨래도 널 수 있다. 볕이 매우 잘 든다.

햇빛에 발을 내놓고 테라스 의자에서 일기 썼는데 바싹바싹 타는 느낌이 들 정도;;

알베르게를 나와 까미노길로 직진하면 철교가 나오고 그 길로 건너야 비랄바(Vilalba)중심가가 나온다.

웅장한 철교를 지나면 오른편에 인포센터 표시가 조그맣게 있고 여긴 박물관(Museo)을 겸하고 있다.

조금 더 가면 버스정류장과 주유소가 나오고 슈퍼 Gadis가 나온다.

여기서 장을 보고 가려면 족히 3km를 왕복하는 셈이니 병(소스, 와인 등)이나 과일을 피하고 가벼운 식품 위주로 사게 된다.

500m쯤 더 가면 왼편 신발가게 2층에 인터넷 카페가 있고 바나 카페가 늘어서 있는 번화가가 나온다.

장도 보고 은행일도 마치고 인터넷도 하고 2km남짓 걸어 알베르게로 돌아오면 파김치가 된다.

그야말로 Petit Camino다. 이건 뭐 별책부록도 아니고;;

 

 

# 까미노 지나오면서 슈퍼마켓도 참 여러 군데를 가 봤다.

이걸 왜 적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기에 써 있기에 슈퍼정리를 한 번 해본다.

 

국내 제약회사로고를 떠올리게 하는 상록수표 El Arbol,

갓 구운 바게트를 자주 진열해둔다(호감의 절대기준) 

빵 종류와 크기도 여러가지고 상품이 다양해 자주 애용했던 곳이다. 

가필드와 왠지 잘 어울리는 노란색 Gadis,

과일코너는 셀프가 아니라 좀 번거롭지만 규모가 대체로 커서 그런지 상품이 많다.

특히 비랄바 가디스는 대형 마트만큼 넓어서 내가 찾던 USB메모리도 있었다.

처음 들으면 슈퍼인지 모르는 Eroski Center,

PB상품이 많지만 물건 품질이 전반적으로 괜찮다.

1000원샵 같이 생겨 처음엔 들어가지 않았던 Dia%,

무난하나 과일 가격이 다른 곳에 비해 좀 비싸다.

이름이 귀에 쏙 들어오는 Onda,

촌스러운 카트 모양 로고가 이름과 어울린다. 갈리시아 들어 처음 본 곳이다.

봉투 뒷면에 XACOBEO 2010 Galicia가 대문짝만하게 쓰여진 게 인상 깊었던 Froiz,

역시 갈리시아 들어 처음 봤다. 순례자들을 위한 슈퍼 같아 괜히 호감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