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Camino de Santiago-del Norte

#26. 100km의 대가(Aviles-Ribadeo : 129.65km)

yurinamu 2010. 10. 24. 22:41

 

 

  

# 오늘은 매우 긴 여정을 떠나야 하는 날이다.

거의 일주일치 거리를 한 번에 가야하기 때문이다.

이제 산티아고까지 330km남짓 남았는데 날짜는 10여일 밖에 없다.

큰 맘 먹고 버스로 100km정도의 구간을 지나가기로 했다.

'이럴 거면 해안길로 왜 온 걸까' 하는 생각이...

잠깐, 아주 잠깐 들었다.

 

매일 25km정도씩 35일만 걸으면 다다르는 줄 알았던 그 곳.

준비없이 왔기에 그리 단순하게만 생각했다.

처음엔 길이 험하든 말든, 내가 힘들든 말든, 10여 일을 그렇게 갔다.

그리곤 몸에 무리가 왔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이었던 15~20km씩만 가려고 했더니만 결국 이렇게 큰 차이가 벌어졌다.

사실 계획했던대로 피스테라(Fisterra)에 가지만 않는다면 3일은 여유가 생긴다.

25일 산티아고에 도착한 후 바로셀로나행 비행기에 곧바로 몸을 싣는다면 조금 더 걸어도 괜찮을거다.

하지만 까미노를 걸으면서, 

더 정확히는 북쪽 해안길을 걸으면서 피니스테라에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기로 했다.

내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여기서만큼은.

 

 

# 히바데오(Ribadeo)행 버스는 오비에도에서 오는 거라 거의 만원이었다.

좌석이 69석*이나 되는데도 꽉꽉 찼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자를 세어보는 이상한 행동으로 알아낸 수치가 절대 아님)

이 집채만한 버스가 짐까지 싣고 마을길 구석구석을 달리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어쨌거나 오늘은 nonstop으로 2시간 반을 가야해서 주스 한 팩과 카메라를 챙겨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까미노 루트를 따라 Soto de Luina, Cadavedo, Pinera, Navia, La Caridad를 지났다.

노란색 화살표가 눈 앞에 휙휙 지날 때마다. 알베르게 표시가 있는 마을에 정차할 때마다

그냥 내리고 싶을 정도로 아쉽고 또 아까웠다.

 

중간쯤 Luarca라는 해안가 도시가 나타났다.

창 밖으로 보이는 마을이 참 예쁘다. 여느 마을과 달리 화사하고 쨍~한 느낌이다.

특이하게 마을 한 가운데 보트 선착장이 있었다.

어쩐지 광경이 낯이 익다 싶더니 어제 도서관에서 찾은 책자에서 사진으로 봤던 곳이다.

괜히 마음이 간다.

여기서 내릴까 잠시 고민이 됐다. 

......내릴까말까내릴까말까.....

마침 버스기사분이 정류장에 정차하고 밖에서 쉬고 계신다. 더 갈등된다.

하기야 뭐 안 될것도 없지만, 

'내가 언제 이렇게 마음이 팔랑팔랑해졌나'싶고

'지금 가뜩이나 날짜가 모자라서 이러고 가는데'하는 생각이 불쑥 든다.

앞뒤 재지 않고 행동을 하면 꼭 책임이 따르고 응당한 대가가 따른다는 걸 

까미노를 통해 절실히 깨우친터라;; 이내 아쉬운 마음을 접고 창문만 긁고 있었다. 

 

순간 창밖으로 '공항'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아! 헤닝이 말한 도시가 여기구나'

오비에도에서 여기, 이 마을을 거쳐갈 것 같다고 했는데 마을 이름을 깜박했었다.

독일인 바이블 노란책을 들고선 여기 가는 길을 물어 또 한번 나를 당황케 했었다.

공항표시 옆에 그려진 비행기를 보니 지금은 독일로 갔을 이 진지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보는 거나 좋아하는 곳, 먹는 것까지 취향이 비슷해

짧은 기간동안 그렇게 많이 마추친 것 같다.

괜찮다 싶은 곳이 있으면 늘 만났으니까.

내가 오죽하면 '유비쿼터스 헤닝'이라고 했을까ㅋ 

 

기사님이 담배를 끄고 다시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 나의 도발은 거기에 그쳤다.

중간중간 길목에 칠해진 노란 화살표가 왜 이렇게 눈에 밟히는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처음 걸을 때 고생했던 기억,

유난히 힘들었던 길, 

버스로 오느라 헤어진 친구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등..

여러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머릿속을 지나갔다.

너무 많은 거리를 뛰어넘어

어쩌면 다시는 못 볼 사람들과 내게 주어진 고생길, 기회를

한꺼번에 놓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 2시간 반을 달려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히바데오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갈리시아(Galicia)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사뭇 다른 분위기의 건물들과 사람들,

심지어 표지판도 낯설었다.

 

4시에 인포센터로 갔더니 알베르게가 이미 다 찼을 거란다.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절망적일데가-

하기야 침대가 12개 밖에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호스텔도 주변에 없어 오늘은 꼼짝없이 바닥신세를 져야 했다.

알베르게에 가보니 저마다 매트를 깔아놓아 바닥은 벌써 발디딜 틈이 없다.

 

유럽친구들이 항상 침낭보다 매트를 소중히 갖고 다니길래 

일광욕 말고 무슨 용도인지 궁금했다.

오늘에야 비로소 확실히 알았다.

우리집 베란다 창고에 던져둔 요가매트가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알베르게 안을 떠돌다가 결국은 호스피탈레로의 허락을 받고 

아직 비어있는 소파에 침낭을 펴기로 했다.

번데기 같이 펼쳐진 침낭을 보니

문득, 내가 이 짓을 왜 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