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Camino de Santiago-del Norte

#24. 다시 비우러 가는 길(Gijon)

yurinamu 2010. 10. 24. 17:30

 

# 그간 미뤄진 일들을 하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오늘따라 기지개를 일찍 켜다 다리 쥐가 올라서이기도 하지만;;

 

아침을 먹은 뒤 바로 나가려다 점퍼와 우비가 생각났다.

다시 방으로 올라가 뜨거운 물에 한 번씩 더 담갔다가 걸어놓았다.

이러다 베드버그 때문에 결벽증 생길 것 같다.

건조한 날씨에 매일 물빨래를 하니

가뜩이나 까맣게 탄 손이 거칠거칠해져 더 흉하다. 에잇.

 

 

# 1층에 내려오는데 헤닝이 가방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렇잖아도 작별인사도 못 한게 마음에 걸렸었는데 진짜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좀 서운했다.

까미노를 하면서 가장 많이 마주친 친구.

이룬에서 출발해 북쪽길의 처음과 끝을 함께 한 진지한 친구로 기억될 거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어쩌면, 어디선가 다시 마주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 처럼.

 

 

# 건물 위주로 보면서 매일 길을 잃는 나를 보고

항상 지형을 생각하며 걸으라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지도를 보고 그 말을 다시금 되새기며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이제 길이 조금 보인다.

왜 그토록 헤맸을까.

비가 주룩주룩 오던 첫날 여기서 택시를 탔던게 생각나 웃음이 절로 나온다. 

 

정신을 차리고나자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

우선 BBVA은행이 문 열자마자 들어가서는 병원 계좌로 송금했다.

서류를 잘 챙겨넣고 보험사에 전화해 다시 확인한 뒤

다른 은행 카드로 경비를 약간 인출했다.

그리고 새로운 여정을 함께 할 침낭을 보러 중심가로 걸어갔다.

 

전문 매장에 가니 가볍긴 한데 너무 비싸다.

얇은 침낭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나왔다.

쇼핑몰 주변을 돌아다니다 다른 스포츠매장에서 좀 더 저렴하고 괜찮은 침낭을 발견했다.

지난 번 것에 비해 조금 도톰한 편이라 무게가 나가지만

머리까지 완전히 감싸는 누에고치 형태인데다 지퍼가 위쪽으로 달려있어

베드버그 피해를 좀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아까 본 것의 1/2 가격이다.

 

침낭을 사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길가다 발견한 까르푸에서 바디클렌저와 비닐팩, 휴지, 무슬리 등 필요한 것을 샀다.

모처럼 장을 본 것이기도 하지만

큰 도시에 있을 때 필요한 물품을 사 두어야 나중에 고생을 덜 한다. 

샴푸와 바디클렌저, 클렌징폼, 비누는 이제 하나로 통일하기로 했다. 

머리카락이 뻣뻣해져도 할 수 없다.

더 이상 무겁게 주렁주렁 가지고 다니기도 힘들다.

 

 

# 방에 돌아와 짐을 챙겼다.

비누향이 나는 깨끗한 배낭에 새 침낭도 넣고

잘 마른 뽀송뽀송한 옷들은 각각 투명 비닐팩에 담아 집어넣었다.

등산화 끈도 다시 고쳐 매 두고

내일 산티아고로 부칠 짐까지 싸 두었다.

깨끗해진 짐과 함께 무언가 조금씩 정리되어 가는 느낌이다. 

 

이제 내일부터 다시 출발이다.

다시 처음 가졌던 그 마음대로, 불평하지 않고 가자.

어차피 채우러 가는 길이 아닌 비우러 가는 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