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Camino de Santiago-del Norte

#21. 비 오는 날(La Isla-Sebrayu : 16.02km)

yurinamu 2010. 10. 24. 12:21

 

 

 

# "오면서 힘들었던 적 있어? 사람 때문이든, 무엇 때문이든..."

그렇게 멀리서 어떻게 오게 됐냐며 묻던 이유르츠가 말한다.

다들 내게 궁금해하고 신기해하던 것이지만

이 친구는 뭔가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얘기한다.

그 때의 악몽 같은 상황이 떠올라 다신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어느 새 얘기가 조금씩 그 쪽으로 가고 있다.

 

길에서 만난 최악의 상황과 사람이지만 그 땐 그것들을 무서워 할 겨를이 없었다.

필사적으로 상황을 탈출해야 한단 생각에 감정 따윈 무시해버렸다. 그걸 잊고 있었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 앞에서 터놓고 얘길 하다보니

'그 때 내가 참 두려웠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든 것이다.

얘기를 듣고 흥분했다 진정을 되찾은 이유르츠는 이내 심각해진다.

그런 경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다며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엄마처럼 단단히 이른다.

어젯밤 안 좋은 기억으로 우울해지더니 오늘 비도 오고...

괜히 눈물나는 날이다.

 

 

# 신디와 아침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왠지 산티아고에서 아니면 못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근데 신디도 같은 생각을 했나보다.

평소 '다음 알베르게에서 보자~' 하고 인사한 뒤 길을 갔는데 오늘은 다르다.

서로 꼭 안아주며 '언젠가 또 보자'라는 인사로 대신했다.

이유르츠는 일찌감치 떠난 터라 보지 못했고

늦게 일어나는 헤닝과는 인사도 못한 채 헤어졌다.

 

 

# 쿨룽가까지 20분 걸린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갔는데

아마 차로 갈 때 얘긴가보다;; 1시간 반 만에 콜룽가 도착.

 

날씨가 우중충 하더니 금방 비도 뿌릴 기세다.

오늘따라 유난히 격려인사가 많다. 

어느 할머니께서 갑자기 불러 세우시더니 날 마치 아는 것처럼 인사하신다.

프랑스인이셔서 그런지 불어로 인사하니 더 반가워하시며 눈물이 글썽글썽 해 이것저것 여쭤보신다.

할머니도 몇 년전 까미노를 하셨는데 지금은 여기 살고 계시다고..

여길 어떻게 혼자 왔느냐며 멀지 않겠냐고 걱정하신다.

당연한데 왠지 서글퍼지는 질문이다. 

 

 

# 마을 인터넷 카페에 들러 해안길 자료를 좀 찾아보기로 했다.

인포센터에 갔더니 수요일부터 연다고 해서 헛탕을 치고

성당도 11시 미사가 없어 그냥 나온터라 달리 갈 곳도 없었다.

 

해안길로 마음을 정한 것은 아니지만 자꾸만 생각이 그 쪽으로 미친다.

2시간동안 인터넷으로 손품을 판 결과

내 손엔 갓 뽑은 코스트웨이 자료와 한국에서 가져온 프리미티보 자료가 들려있다.

또 하나의 갈림길을 만나 선택의 기로에 섰다.

내가 날 시험하는 기분이다.

파리를 출발할 때 생장행과 이룬행 열차표 두 장을 쥐고 있었던 것처럼. 

계획대로 할 것인가, 마음 가는대로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 카페를 나왔더니 2시가 다 되어가는데 비가 막 쏟아진다.

걷는 중에는 한 번도 비를 만난 적이 없는터라 당황스럽기만 하다.

산길을 구비구비 돌아 마을을 찾느라 한참을 헤맸다.

작은 마을에 드문드문 집이 있고 인적이 드물어,

빗 속에서 주소도 없는 알베르게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

 

겨우겨우 찾아갔는데 알베르게가 거의 만원이다.

크리스티나와 마틴, 비비카, 헤닝도 이어 도착하고

콜롬브레스에서 만난 프랑스인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오셨다.

 

 

# 아래층에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는 내게 대뜸 물으신다.

"미국인이니?"

저;;저요?-.-;;;;;;;;;;

하긴 독일인이냔 얘기도 들었는데..

(이후 여행 중에는 스페인인에게 현지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건 어딜 가나 현지인 소릴 듣던 내 여행 중 불문율이긴 하다.

그래도 아시아권에서는 그럴만했지만 이건 좀ㅋ

캐나다에서 오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셨는데 아마 한인교포들을 많이 보신듯하다^^;;; 

 

옆 침대에 있던 독일인 친구와 얘기하던 중 알게 된 사실 하나.

이 곳은 주변에 슈퍼나 바가 없단다.

생각해보니 올 때도 보이던 건 오직 밭+소+밭+소 였다.

식료품 차가 마을에 들어와야 먹을 것을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역시 고급 정보는 독일인에게~ㅋ

 

과연 저녁 7시가 되자 조그만 트럭이 클랙슨을 '빠앙~'울리면서 도착한다.

굉장히 클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작고 내가 찾는 것은 없다.

다들 없는대로 과일과 빵, 와인을 사느라 분주하다.

난 가지고 있던 냉동 생선 레토르트로 간단히 점심 겸 저녁을 먹기로 했다.

베샤멜 소스에 담근 흰살 생선이라 오븐에 굽기만 하면 됐다. 

마틴이 작동법을 가르쳐주고 갔는데 문제는 작동을 안 한다는것;;

할 수 없이 냄비에 보글보글 끓여서 데웠다. 

잘 익지도 않는 것이,, 앞으론 생선 안 살테다.

 

우연히 독일인만 5명인 테이블에 앉게 됐다.

다들 내가 밥 먹는 걸 유심히 쳐다보는데 참 뻘쭘하다.

유독 내가 먹는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한국에서도 생선을 많이 먹어?"

"바게뜨도 있니?"

"치즈는?"

질문도 많고 다양하다.

빵 먹는 동양인을 처음 본 건가;;;

 

 

 

 

# 오늘은 잠자기가 꺼림칙하다.

매트리스는 한 눈에 봐도 곰팡이가 피어 지저분하다.

침낭을 펼쳐놓기가 영 찝찝해 판초우의를 깔고 그 위에 놓았다.

게다가 비가 와서 다들 빨래를 못하고 널어놓은지라 

꿉꿉한 방 안엔 땀 냄새와 습기로 가득하다.

 

한데 붙어있는 화장실과 샤워실은 남녀용 각각 하나씩인데 심지어 여자화장실은 고장이다.

한 칸 있는 화장실 겸 샤워실을 줄서서 쓰느라 저녁 늦게까지 어수선하다.

가뜩이나 비오는 날 불편하고 지저분한 알베르게에 기분이 썩 좋지 않다.

하늘에서도, 알베르게에서도, 마음에서도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