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Camino de Santiago-del Norte

#22. 내겐 너무 버거운 그 분(Sebrayu-Villaviciosa-Gijon : 35.03km)

yurinamu 2010. 10. 24. 15:25

 

# 몸이 영 찌뿌둥하다.

기지개를 쭉 켜니 다리에 또 쥐가 오른다.

'하루라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군.'

다리를 주무르고 사다리를 내려오려는데 얼굴이 한쪽이 화끈화끈하다.

손으로 오른쪽 뺨을 만져보니 무언가 볼록볼록 돋아나 있다.

느낌이 이상해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런,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그 분이 온 것이다. 베.드.버.그.

얼굴을 죽 기어가며 연달아 물었는지 자국이 6개나 된다.

벌겋게 부푼걸 보니 이게 기어간 경로인 것 같아 더 징그럽다.

어깨에도 줄지어 3방, 팔-다리 이곳저곳에 작은 수포들이 올라와 있다.

찝찝해서 우비도 깔고 잤는데 이게 웬;;ㅜ  

 

다들 어떡하냐며 큰 도시로 가서 병원이나 약국에 가야겠다고 나보다 더 난리다.

스페인 친구들은 이게 다 더러운 알베르게 때문이라며 매트리스에 마구 삿대질을 한다.

온몸이 근질근질 한 것 같고 금방이라도 퍼져나갈 것 같다.

일단 모든 소지품을 세탁하고 번지지 않게 하는게 급선무다. 

원래 모기만 물려도 심하게 곪는데 처음 만난 벌레로 더 고생할까 두렵다ㅜ

 

비야비시오사(Villaviciosa)로 가야 하는데 거기에서 해안길이나 프리미티보를 결정해야 병원에 갈 수 있다.

그곳이 마지막 선택을 할 수 있는 갈림길이기 때문이다.

일단 6km를 잰걸음으로 걸어 비야비시오사에 도착했다.

인포센터에서 버스편을 알아보니 병원이 있는 오비에도(Oviedo)까지 버스로 건너뛰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다.

그리하여 북쪽 해안길의 대도시 히욘(Gijon)으로 가기로 했다. 

아...베드버그때문에 해안길로 가게 되다니,

참 멋대가리 없는 결정이다.

 

 

# 정류장으로 갔는데 어제 세브라유에서 함께 묵었던 독일 친구들 2명이 앉아있다.

사정을 하소연하자 한 명이 자기도 여행 중 베드버그때문에 엄청 고생했다며 발을 동동 구른다.

함께 11시 표를 끊어 차에 오르고, 40-50분을 달려 히욘에 도착했다.

 

다시 큰 마을이 나오니 정신이 없다.

인포센터를 찾는데만 30-40분이 걸렸나보다.

겨우 찾아가는데 갑자기 비가 마구 내려 옷을 꺼내입고 다시 걸었다.

물린데는 화끈화끈거리고 비까지 오니 너무 짜증이 났다.

빨리 병원 갔다가 옷과 가방을 세탁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크레덴시알도 마침 다 채워서 인포센터에서 새로 발급받은 후 병원을 안내 받았다.

이 곳 알베르게는 너무 멀어서 택시를 타도 한참 나가야 하니 

현지 대학생들이 묵는 레지던스를 소개해주겠다고 한다.

원래 큰 도시에 가면 인포센터에서 숙박이나 레스토랑 추천을 해 주지 않지만,

비도 많이 오는데다 내 사정을 듣고는 빨리 가는게 좋겠다며 이 곳에 예약까지 해 주었다.

베드버그가 있을까 싶어 판초우의는 꺼내지도 못하고 비를 쫄딱 맞은 채 겨우 찾아간 곳,

'Residencia Cultural y Universitaria Cimadevilla'

 

 

 

 

# 일단 이틀을 예약하고 방에 들어갔다. 

한눈에 봐도 깨끗해보여 안심이다. 

베드버그 물리칠 때까지는 알베르게보다 낫겠다 싶어 들어가자마자 짐을 풀었다.

가방에서 꺼낸 모든 물건은 즉시 비닐봉투로 투하.

낡은 침낭은 까미노 후 버리고 오려고 했지만 볼 때마다 찝찝하고,

세탁해도 이틀 내 마를 것 같지 않아 고민 끝에 버리기로 했다. 날씨도 도와주지 않으니ㅜ

옷은 모두 레지던스에 세탁을 맡기고 가방과 주머니 등 소지품은 뜨거운 물에 담가 놓았다.

그리곤 서둘러 병원으로 직행!

 

 

 

 

# 인포센터에서 소개받은 큰 병원으로 갔다.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어 말이 통하지 않으니 한참만에 병원장이 직접 내려오셨다.

이 곳은 응급환자를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진료를 받으려면 다른 곳으로 가야한단다.

 

여러 사람의 추천과 통역을 거쳐 소개받은 개인병원 응급센터를 찾았다.

들어가서 사정을 얘기하자 까칠한 언니야가 유러피안 보험카드를 보여달란다.

이것이 없으면 진료를 받을 수 없단다.

아.. 이게 외국인의 설움인가ㅜ

그래도 혹시나 해서 가진 것은 이것 뿐이라며 여권을 내밀었다.

보험처리는 개인적으로 할테니 진찰만 받게 해달라고 했다. 

그들도 외국인을 받는 게 처음인지 각종 서류를 들고 왔다갔다 하며 겨우 접수를 시켜줬다.

 

겨우 들어간 진료실에는 스페인어만 할 줄 아는 의사와 스페인어를 못하는 나 뿐이다. 

증상을 어떻게 설명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다만,

만약을 대비해 베드버그를 스페인어로 수첩에 적어갔던 게 도움이 됐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우여곡절 끝에 해독제 주사를 맞고 12시간마다 먹는 약을 처방받았다.

한국에서 보험처리 할 서류때문에 의사는 처방전을 2장씩 작성하고 나는 선불로 63유로나 지급해야 했다.

카드 결제도 안 되고 내일 은행에 가서 직접 병원 계좌로 송금해야 한단다. 뭐가 이리 복잡한지;;

나오는 길에 약국에 가서 스프레이와 바르는 연고를 샀다.

 

조금 있으려니 독한 주사약 때문인지 어지러워 앞이 핑핑 돈다.

비를 피해 Valor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쇼콜라 한잔을 마셨다. 그러고보니 점심 먹을 겨를도 없었다.

한국에 있는 보험사에 전화를 해 알아보려는데 때마침 전화카드가 똑 떨어져 끊겨버렸다ㅠ

전화카드도 없고 돈도 없고 아프고 춥고 비도 오고...최악이다.

 

비바람이 너무 몰아쳐 숙소로 간신히 돌아왔다.

좁은 샤워부스에서 배낭도 다 빨고 방수 되는 소지품은 모두 꺼내 물로 닦았다.

심지어 가리비까지 씻었다-.-;;;;;

가방 커버와 모자, 자잘한 주머니까지 뜨거운 물로 빨고 말린 뒤 스프레이도 뿌렸다.

쓰던 선크림, 연고, 먹던 음식들은 다 버렸다. 

모아왔던 지도와 책자, 그리고 프리미티보 자료까지.

그리고 짐 될만한 것은 내일 산티아고로 부치기로 했다.

 

손빨래 한 것까지 널고 나니 12시가 넘었다.

약 기운에 지쳐 쓰러지다시피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