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Camino de Santiago-del Norte

#23. 헤닝의 진지한 선물(Gijon)

yurinamu 2010. 10. 24. 16:47

 

 

# 오늘도 역시 다리에 쥐가 나서 깼다.

머리가 띵 한게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물린데는 수포가 여전히 붉게 올라와 있지만 다행히 퍼진 곳은 없었다.

 

1층에 내려갔는데 아침 먹는 곳이 무슨 바를 하나 옮겨다놓은 것 같다.

주인이 갓 뽑은 카페 콘 레체와 갖가지 빵을 준비해준다.

어제 하루종일 끼니를 거른데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정신이 반짝 났다.

 

어제 정신이 없어 1층은 미처 못 봤는데

제법 분위기 있는 공간이 이제 좀 눈에 들어온다. 

주인이 곳곳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조명도 부드럽고 모두 스탠드식으로 되어 있어 여기선 왠지 글이 잘 써질 것 같은 느낌이다.

들어올 때 외관도 특이하다 싶었는데 인터넷을 사용하고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이 꽤 넓다.

 

잡지와 신문도 읽을 수 있고 자료도 찾을 수 있고 인터넷도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아늑하다'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그런 공간이다.

 

 

 

 

 

# 안정을 되찾은 뒤 방에 올라가 어제 유일하게 남겨둔 원피스 하나를 입었다.

오늘은 다행히 날씨가 양호하니 돌아다니며 어제 못한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기로 했다.

일단 은행가서 병원비 부치고, Tabaco찾아서 국제전화카드 사고, 보험사에 연락하고.

그런 다음 우체국에 가서 세탁한 옷가지 몇 개와 기념품을 산티아고로 부치고 침낭을 사러 가야 한다.

 

우선 어제 들렀던 인포센터로 갔다.

"BBVA은행이랑 우체국, Tabaco위치 좀 알려주세요. 아! 침낭 살 수 있는 곳두요."

"음,......."

그냥 질문이 너무 많아서 뜸을 들이는 줄 알았는데 

날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계속 쳐다본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확 스친다.

'제발 축제라고만 말하지마...ㅠㅠㅠ' 

 

"오늘은 휴일이에요."

젠장,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 거지같은 날에 또 당첨됐다.

오늘은 일요일의 3일째 되는 날(수요일)이라 쉰다는,

도무지 설득력없는 논리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침낭을 못 사는 건 물론이요, 타바코도 몇 곳만 열었고 은행과 우체국도 물론(!) 닫았단다.

대체 공공기관은 왜 닫는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럼 어디가 열었나요?"

"레스토랑이랑 기념품가게요."

-.-;;;;;;;;;;;;;;;

마음을 다스리러 바닷가로 걸어갔다.

 

 

 

 

# 오늘 송금은 어찌하나 싶어 ATM기라도 찾아보러 나섰다.

여기 히욘에는 있다던 시티뱅크도 직접 가보니 웬 바 하나가 떡 하니 들어서 있다. 심지어 몇 년전에 바뀌었단다.

시티뱅크 ATM기도 없어 현금인출도 할 수 없었다.

국제전화카드를 파는 타바코도 못 찾아서 전화도 못하고ㅠ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일단 병원으로 다시 가서 내일 입금하겠다고 간호사에게 얘기한 뒤 나왔다.

침낭도 없고 가방, 신발, 옷도 다 빨았는데 이대론 어디 가지도 못한다.

날짜도 별로 없는데 여기서 하루를 더 묵게 생겼다.

머리가 지끈지끈해지는 것 같아 해안으로 가서는 바다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마을을 털레털레 돌아다니다 기적적으로 tabaco 발견!

전화카드를 사긴 샀는데 사용법을 모르겠다.

물어보니 친절하게 스페인어로 설명해준다;;

공중전화부스로 가서 해봤는데 자꾸만 핀코드를 입력하라는 스페인 언냐의 목소리만 쏼라쏼라~

몇 번을 시도끝에 진이 빠져 타바코 찾기도 포기하고 그만 숙소로 돌아왔다. 

리셉션 전화를 빌려 이것저것 눌러보는데 이것도 마찬가지.

참 되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고개를 푹 숙이고 좌절하고 있는데 누가 뒤에 와선 등을 짚는다.

깜짝 놀라 소리 지를 뻔;;

헤닝이다. 자기가 아는 척하고도 놀랐나보다.

서로 어떻게 왔냐며 말도 더듬는다.

헤닝도 어제 왔단다. 같은 층, 그것도 옆 방이었는데 모르고 있었나 보다.

펜션도 9개나 있고 호스텔, 알베르게까지 숙소가 20여개가 넘는데 어떻게 여길 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대답이 가관. 그냥 길 따라 와 봤는데 이 건물이 왠지 끌려서 들어왔단다.

여기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 좀 쉬어갈 겸 하루 더 묵는다고 했다. 

올해는 여기 히욘에서 멈추고 오비에도에 들렀다가 내일 모레 독일로 돌아간다니

에닌의 까미노는 이제 끝난 셈이다.

 

Santa Catalina 언덕에 어제 올라가봤는데 거길 같이 가자며 앞장선다.

내 키만한 계단을 겨우 올라가니 탁 트인 드넓은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진다.

뒤를 돌아보니 몽마르뜨 언덕처럼 히욘 중심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여기가 바로 히욘의 북쪽 끝이다. 

이 바다를 가로질러가면 아마 프랑스가 나오겠지? 

바닷바람 맞으며 앉아있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기껏해야 이틀이지만;;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며 얘기를 나누던 중이다.

나는 벼룩과의 원치않는 조우를 마구 하소연했다. 

베드버그를 모르는 헤닝은 그것 때문에 침낭도 버리고 병원에 다녀왔다니 깜짝 놀란다.

이후 갑작스런 루트 변경으로 없어진 자료들, 밀린 일정, 예상치 못한 예산 지출 등..

이러다가 산티아고나 제대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징징거렸다.

정확히 말하면 아프고 힘든 것보다 신경써야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헤닝은 여느 때처럼 진지하게 듣고 있더니 나직이 묻는다.

"산티아고까지 가고 싶은 거야?"

"응. 자신은 없지만.. 가고는 싶어."   

"....then, what's the problem?"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내가 생각하기에도 모두 변명처럼 들린다.

 

그냥 내가 문제다. 

순간 울컥하고 말하지 못했는데 그게 답이었다.

 

여기 오게 된 것도,

짜증나는 일도,

이렇게 고생하는 것도 다 나 때문이다.

순전히 여기 오고 싶어했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거기에 갈 수 있게 간절하게 바라는 건 나니까.

헤닝은 떠나기 전 헤닝다운 진지한 답을 주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