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Camino de Santiago-del Norte

#17. 유난히 길었던 하루(San Vincente de la Barquera-Colombres:17.43km)

yurinamu 2010. 10. 22. 23:09

 

 

# 알베르게를 나서는데 헤닝이 뒤따라오며 묻는다.

"오늘도 버스타고 갈거야?"

걷는다고 당당하게 말한 다음 길을 잃었다;;

 

동네 청소년들의 도움으로 콜롬브레스로 향하는 길에 겨우 접어들었는데

이건 까미노 루트가 아닌 차도였다.

그나마 갓길이 제대로 되어있는 편이고

아침에 구름이 많이 껴서 그런대로 걸을만 했다.

 

도로(N-634)로 걸으면 좀 위험하고 매연이 있긴 하지만

차기 그리 많이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남은 거리가 중간중간 표시되어 있어

눈에 확확 띄기 때문에 기운이 난다.

뭐 길 잃을 염려도 없고ㅋ 

 

 

# Pesues에서 화살표가 나타났다.

해가 점점 올라오는 것을 보고 까미노루트로 접어들었다.

까미노 루트는 길은 험해도 대부분 산과 숲이라;; 나무그늘이 많다.

물론 털썩 앉아 쉴 곳은 없다.

 

화살표가 제대로 되어 있지않아 좀 불안했지만

한두번도 아니니 길이 난 곳을 따라가기로 했다.

완만한 길에서 조금 지나자 험준한 산길이 나타나더니

완전 나무가 우거진 덤불로 가로막혔다.

주위에 화살표도 없다.

지나온 길도 산 속인데다

화살표가 드문드문 있어 어긋났다간 꼼짝없이 갇힌다.

혹시나 해서 조금 더 나아갔더니

화살표는 역시 없고 설상가상,

갈림길이 여러개다.

 

길 잃었다ㅠ

 

아무도 없는 산 속에 나만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눈물이 찔끔 나려는 순간,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가는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내려가지..'

 

골똘히 생각하는데 손에 든 스틱이 눈에 들어왔다.

스틱에 붙은 나침반을 보자 아까 잠시 쉬었던 마을에서 무심코 본 마을 지도가 생각났다.

''서쪽'단어가 불어랑 비슷하구나' 하고 지나쳤는데

마을을 벗어날때 서쪽으로 계속 왔던 것 같다.

'어차피 산티아고 가는 길도 서쪽이니 계속 가면 무슨 마을이라도 나오겠지'

 

나침반을 보니 오늘은 모두 앞쪽이 서쪽(W)을 가리킨다.

왠일인가 싶었다.

얘가 평소엔 제멋대로 한쪽은 동쪽, 한쪽은 북쪽을 가리켜 영 못미더웠던터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 당장 이것밖에 믿을 것이 없는데.

온전히 싸구려 스틱 한 쌍에 의지해 한걸음 한걸음 서쪽으로 나아갔다.

 

가시 덤불을 헤치고 거의 길을 내다시피하며 산을 내려왔다.

한참을 내려왔을까, 나무 그루터기에 짠~! 하고 화살표가 보인다. 

왜 이제서야 나왔니ㅠㅠ

그렇게 반갑고 기쁠수가 없었다.

 

 

 

 

# 알베르게가 두 곳이지만 스포츠센터라는 한 곳은 찾지 못해 결국 호스텔로 갔다.

 조금 뒤에 비비카가 지친 얼굴로 들어온다.

스포츠센터 알베르게에 갔었는데 너무 지저분하고 형편없다고 흥분해서 얘기한다.

거길 나오면서 길을 잃어 난생 처음 오토바이를 얻어타고 왔다며 숨도 제대로 못 고른다.

'가방이 서로 똑같다' 부터 시작해 까미노를 오게 된 얘기, 직업 얘기, 길 얘기 등등

처음 만난 빨강머리 아줌마와 수다 한판이 벌어졌다.

 

 

 

 

# 마을 구경도 할 겸 아까 기웃거렸던 박물관이 예뻐서 들어가봤다.

이 곳 파란 하늘과 참 잘 어울리는 건물이다.

내부도 외관 못지않게 화려하고 멋있었다.

역사박물관 같은 곳이었는데 물건이나 책 외에도 방을 그대로 전시해 둔 것이 매우 인상깊었다.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스페인어 설명을 '음....'하며 보고 있으니

박물관 담당자가 빙긋 웃는다.

 

 

 

 

# 저녁을 먹으러 나갔는데 마땅한 레스토랑이 없다.

아까 털레털레 돌아다니면서 그나마 괜찮았던 바를 봐 둔터라 골목에 있는 그 곳으로 들어갔다.

지도도 정리하고 간단히 요기도 하다가 한참만에 나서려는데,

"올라~ 세뇨리따~!"

누군가 능청맞게 부른다.

돌아봤더니 헤닝과 비비카다.

아까 낮에 헤닝도 돌아다니다가 나와 마주쳤는데 그때 봐두고 온 것이란다.

맥주 한잔 하자고 해서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스페인어를 조금 할 줄 아는 비비카 덕분에 무난히 주문을 하고 필수 스페인어도 조금 배웠다.

짧은 커트머리에 강단있어보이는 그녀는 7살 아들을 둔 핀란드인이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만큼 동안이다.

처음에 독일인인줄 알고 물었는데 길에서도 그런 얘길 여러번 들었나보다.

독일인 헤닝도 자기나라 사람인줄 알았단다ㅋ

 

몇 년 전에 까미노를 알게 되어 휴가 겸 왔는데 가족, 친구들 모두가 반대했단다.

동생에 같이 가자고 했더니 물어보자마자 거절했단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나라에서만 그런게 아녔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대체 어떻게 알고들 오는지 무척 신기해했다.

 

건축가인 헤닝은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며 이것저것을 묻는데 대답하기가 참 그런 류다.

남한과 북한의 인구는 각각 얼마나 돼? 

그럼 서울은 인구가 얼마나 돼?

한국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살아?

거기도 높은 산이 있어?

고도가 몇m나 돼? 등등;;;;;

  

내가 맥주 한 병 마시는 동안 비비카는 세 병, 헤닝은 다섯 병을 마셨다.

아무래도 얘네는 이게 저녁인 듯 하다.

 

어두워져 알베르게로 돌아가려고 보니 벌써 9시가 다 됐다.

비비카와 총총걸음으로 가는데 느긋하게 오던 헤닝이 한 마디 한다.

"한잔 더 할래?";;;;

오늘은 하루가 48시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