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알베르게에서 유독 늦게까지 불을 밝혀둬서 잠을 설칠 뻔 했다.
잠이 안 와 몇 분째 엎치락 뒤치락~
침낭을 뒤집어 쓸까 하다 더워서 그냥 눈만 감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누군가 어눌한 발음으로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부른다.
"쑤늉, 쑤늉~"
날 숭늉이라 부르는 사람은 파스칼 뿐이다.
그렇게 일러줬는데, 어떻게 하면 내 이름이 밥물이 되니ㅜ
구에메스에서 내 이름과 똑같은 사람이 다녀갔다며 방명록을 뒤져 한국인 이름을 보여줬었다.
그런데 완.전.다.른.이.름. 한 글자도 겹치는 발음이 없었다;;
어이없어 하는 내 표정을 보곤 잠시 멋쩍어 했으나 그 후에도 계속 날 이렇게 부른다.
근데 설마.. 구에메스 호스피탈레로가 여길?
멀리서도 잘 들리는 성우 목소리인 그가 정말 짠~ 하고 나타나더니 자기 안대를 손에 쥐어준다.
으잉? 꿈인 줄 알았다.
아침에 알베르게에서 인사한 호스피탈레로가 여기 알베르게에 나타난 것도 놀라웠는데 어찌 아시고는;;
고맙다고 하곤 안대를 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사실 1시간 정도는 굉장히 유용했는데 그 후엔 휙 빼서 머리맡에 뒀다.
눈에도 땀이 찬다는 걸 이 때 알았다.
아침에 주섬주섬 챙겨서 드렸더니 가져가서 나중에도 쓰란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좋은 거라^^;;
마음만 감사히 받고는 돌려드리고 진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동안 petite fille라 하시며 유난히도 살뜰히 챙겨주었던 파스칼~
개구장이 키다리 아저씨, 감사했어요:)
# 다솜이는 오비에도까지 기차를 타고 간다고 했다.
하지만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는 말에
긴 여정 중인 동생의 표정을 보며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하루간의 짧은 동행을 끝으로 다솜과 헤어진 후 길을 나섰다.
대부분의 추천 루트로는 공업지대인 Mogro까지 Feve를 타고 가야 했지만
난 Cudon이나 Barreda까지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에 올라 무뚝뚝해 보이는 기사님께 조심스레 여쭤보니 별 대답없으시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맞게 탔겠지 싶어 그냥 잠자코 있었다.
그러더니 얼마쯤 가서 중간에 노란 화살표가 그려진 까미노길에 척 내려주신다.
Muchas Gracias~!
# 내려서 가도가도 동네길만 나온다. 책도 없고;;
루트를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지나는 사람도 없고 이거 원;;
2시간 반을 쉬지 않고 걸었는데 갑자기 중세시대 건물처럼 돌로 지어진 마을이 나타났다.
오는 내내 보이지 않던 관광객들도 부쩍 눈에 띈다.
여긴 어디지?
기념품 가게에 가서 엽서를 보니 '산티아나 델 마르'라고 적혀있다.
이렇게 갑작스레 맞게 된 오늘의 목적지.
# 이 곳 알베르게는 미술관에서 운영을 한다.
미술관 내부에 전시도 둘러보고 뜰에 놓인 조형물도 보았다.
성당이나 수도원은 아니지만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원래 인포센터에서 지도를 받아야 하지만
담당자는 인포센터도 못 찾는 길치에게 손수 마을약도를 뽑아 길을 알려주셨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알베르게 앞에 짐을 내려놓고는 마을 곳곳을 둘러봤다.
아스투리아(Asturias) 지방에 온 것이 실감난다.
마을 전체가 돌로 지어진 옛 건축물들이고 중세 갑옷을 전시해둔 박물관도 있다.
기념품 점에도 마녀와 요정을 캐릭터화한 상품과 젖소무늬가 그려진 문구류가 많다.
우유가 많이 나는 지역인지 우유, 치즈, 잼, 파운드케익을 상점 곳곳에서 판다.
# 유명하다는 산타 줄리아나 대성당에서 8시 미사를 봤다.
문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보였는데
정작 미사볼 때가 되니 마을 사람들 몇 분만 계시다.
들어가는 사람도 몇 안 되는데 입구에서 경비가 삼엄하다.
괜히 뻘쭘하게 들어가서는 마음먹고 가져온 다국어미사책을 폈다.
외국인은 나 혼자인지 사람들이 힐끗힐끗-
신자들을 바라보시던 신부님이 날 보시곤 멈칫하셨다.
평화의 인사 나누던 할머니들도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라셨다.
악수하고 다시 손을 모아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니
몹시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따라서 합장~ㅋㅋ
성체 영하기까지 20분 걸렸다.
미사책만 쳐다보다간 그냥 끝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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