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Camino de Santiago-del Norte

#12.산티아고 가는 길은 산티아고 가는 길이 아냐(Santona-Guemes:22.24km)

yurinamu 2010. 10. 21. 12:17

 

 

# 알베르게에서 또 모기떼를 만나 전쟁을 치렀다.

왱~ 소리만 나면 그때부터 잠을 못 자겠다.

뿌리는 약을 짊어지고 다닐수도 없고 불을 켜고 잡을 수도 없으니 고역이다.

물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침낭으로 둘둘 싸매고 있을 수 밖에...

머리도 못 말린 채 길을 나섰다.

 

마을길을 따라 쭉쭉 가다가 스페인 일행 3명을 만났다.

앞으로 9km가 남았다고 귀띔해주신다.

이렇게나 빨리 걸었나 싶어 좀 의아하긴 하지만 별로 안 남았다니 기분은 좋다.

이분들 어찌나 걸음이 빠르신지 나는 어깨가 빠지는 것 같은데 어르신들이 잘도 걸으신다.

 

 

 

 

# Castillo와 San Miguel de Meruelo를 거쳐 Bareyo에 가까워졌다.

오르막과 산길, 덤불이 수시로 나오니 스틱이 요긴하긴 하다.

처음엔 짐이었는데 이제 다리가 네 개인 것 같다.

 

마을길에서 차도로 접어드는데 저쪽 건너편에 아이들이 몰려있다.

아이들이 어린걸로 봐선 보육원이나 유치원 같다.

그 중 노랑머리 소년 3명이 쪼로록 서서는 나를 유심히 쳐다본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서로 툭툭치며 눈치를 본다.

왜 그러나 싶어 그냥 빙긋 웃어보였다.

그러자 셋이서 갑자기 손나팔을 만들더니 목청껏 외친다.

"부엔~까미노오~!!!!"

 

ㄲ ㅑ~ 병아리같다ㅋㅋㅋㅋ

"그라시아스~!!" 

고맙다며 손을 흔들자 수줍게 웃더니 막 손을 흔든다. 

6살 남짓 되어보이는 아이들이 저 인사의 의미를 알까? 알겠지?^^

집 앞을 순례자들이 지나고 동네 곳곳에서 노란 화살표를 보는 아이들,

어른들이 배낭을 짊어진 사람들에게 'Buen Camino'라고 인사하는 것을 보고 자란 저 아이들은

까미노에 오르는 것과 그 의미를 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겠구나 싶었다.

 

이제 2km쯤 남았나 싶었는데

웬걸, 5km는 가야한단다. 

역시 아까 9km남은게 아녔어;;ㅜ

가다보니 화장실이 급한데 차로만 계속 나온다.

중간에 성당이나 주유소, 바 같은 곳이 없을 때는 참 곤란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을 때쯤 한 캠핑장이 나타났다.

하는 수 없이 양해를 구하고 공공화장실 입성!

친절한 안내소 언냐는 캠핑장 지도까지 주시며 위치를 설명해주셨다.

그러고보니 캠핑장이 무척 크다. 캠핑카 수십대가 줄지어 들어서 있다.

지도를 챙겨주신 이유가 있었다ㅋ

공공시설은 따로 마련되어 있고 저마다 몰고 온 캠핑카 안에서 여유롭게 휴식중이다.

책도 보고~ 낮잠도 자고~ 진정한 휴가란 이런거지 싶다:)

 

 

#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힘겹게 길을 오르는데 표지판이 나왔다.

'구에메스 1km'.

오른쪽 길로 들어서려는데 두 아저씨가 알베르게는 여기라며 언덕 꼭대기를 가리킨다.

하마터면 지나칠뻔 했다.

급경사를 오르자 산타할아버지 같은 분이 나와 반겨주신다.

마침 모두 식사 중이라며 숨돌리기도 전에 호스피탈레로 파스칼이 물과 음식을 권한다.

크레덴시알은 그냥 뒷전이다;; 이름을 적기도 전에 이것저것 묻는다.

프랑스인인 파스칼은 2년 전 까미노를 했다가 이 곳에 정착해 호스피탈레로가 되었단다.

외국인 호스피탈레로라니, 참 흥미로웠다.

불어를 조금 한다니 너무 반가워하시며 계속 말을 거시는데

이 분, 성우 장정진씨와 목소리가 넘 비슷해 꼭 라디오 듣는것 같다.

 

한참 얘기를 하고 있는데 누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온다. 까트린이다!

가방은 한 켠에 벗어두고 함께 테이블로 갔다. 

아까 길에서 만났던 스페인어르신 세 분도 여기 계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렌틸콩 스튜를 맛나게 먹었다.

이렇게 따뜻한 음식은 정말 오랜만이다:)

까트린은 다리 통증때문에 이 곳에 3일째 머무는 중이란다.

지금 거의 요양중이다.

 

 

 

 

알베르게를 천천히 둘러보니 무척 예쁘고 조용하고 깨끗했다.

침대가 3층까지 있어 허걱 했지만 모기가 없어 너무 좋다.

 

 

 

 

# 8시 반쯤 별채 도서관(서재에 가까움)에서는 이 곳의 역사와 다음 코스에 대한 정보 강의가 있었다.

김수미씨 목소리와 넘 똑같은 프랑스인 아줌마가 스페인어를 통역해주셨다.

스페인어-불어-한국어로 이어지는 난해한 대화;; 제대로 알아들은건지 모르겠다.

 

호스피탈레로의 할아버지 대에 지어진 이 곳은 30년 전 처음 생겼고 11년 전 처음 페레그리노를 받아들였다.

BRENZO라는 NGO의 지원을 받고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해 기부제로 운영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많은 자료를 모아오셨고 이 곳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사진으로 남겨 전시도 해 두셨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산티아고 가는 길이 아니라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오로지 그 곳이 목적이 아니란 것이다. 

만나는 사람, 보이는 풍경, 받아들이는 마음이 중요한 거라는 얘기를 해 주셨다.

내 갈길이 바빠서 혹은 가는 것이 힘들어서 놓치기 쉬운 것들이다.

막상 길을 걷다보면 멋있다고 하는 풍경도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고

사람들과도 비슷비슷한 얘기만을 하거나 금방 헤어지기 일쑤다.

까미노 유경험자들의 조언을 들으며 그 멋을 한층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 강연 후 저녁을 먹으러 1층에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산장같은 분위기가 따뜻하고 가족적이다:)

저녁은 스프와 빵, 토마토펜네, 과일, 요거트, 와인까지 코스로 갖춰진 풍성한 식탁이다.

호스피탈레나와 까트린, 3대가 같이 온 스페인 가족과 함께 식사하며 얘기를 나눴다.

 

다들 연령대가 높은데도 짐을 지고 나와 똑같이 걷는 것을 보니 참 대단하다.

72세 할아버지도 계셨다. 순례자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해지신 분이었다.

나도 과연 저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