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 아침부터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더니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오니까 주룩주룩 쏟아진다.
길가에서 배낭커버를 씌우고 방수 점퍼를 대충 껴입은 뒤 우체국으로 내달렸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게다가 가방이 무거워 손에 든 스틱도 거추장스러운데 판초우의를 꺼내기란 쉽지 않다.
앞으로도 여간해선 입지 않을 것 같다.
결국 생쥐꼴이 되어서는 허둥지둥 소포 부치는 곳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알베르게에서 후딱 쓴 엽서 2장과 옷가지,
그림일기장, 색연필, 기념품 몇 가지를 구겨놓은 짐 한 뭉텅이.
얘를 어서 한국으로 부칠 생각이다.
직원이 시키는대로 엽서와 소포에 주소를 각각 적으면서도 이게 잘 갈까 의심스럽다.
어쨌든 짐이 1.2kg이나 줄었다는데 만족하며 우체국을 나왔다.
# 일단 공업지대인 포르투갈레테(Portugalete)역으로 가서
포베냐(Pobena)까지 약 13km를 걷기로 했다.
지하철이 단순하게 되어 있어 무사히 찾아갈 수 있었다.
마을에 내리자 흐린 날씨 탓도 있지만 공장이 많아 분위기가 어둡고 칙칙하다.
기차역 같이 생긴 인포센터 앞에는 장이 섰다.
싱싱한 야채와 과일을 내놓은 상인들은
아침부터 마을을 찾아온 동양인 순례자가 신기한 듯 뚫어져라 쳐다본다.
인포센터로 들어갔더니 직원도 무척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요? 그렇게 멀리서?
그것도 혼자 이렇게 오다니... 정말 용감하네요~
힘내서 무사히 산티아고까지 가길 바라요.
부엔까미노!"
순례자들을 많이 봐 왔을 그녀지만 난 무척 특별한 경우라는 듯,
그렇게 유난히 많이 격려해줬다.
(이 날 저녁 일기를 쓰면서는 그녀가 했던 말이 사뭇 다르게 들렸다.
그게 징조인 줄 미리 알았더라면..)
# 특이하게도 마을 길에 있는 긴 무빙워크를 타고 언덕을 올라 까미노 길로 접어들었다.
빨간색의 긴 철교를 지나는 동안 산책하는 마을 사람들과 많이 만났다.
눈이 마주치면 '올라!' '부에노스 디아스!'하고 웃으며 인사하는데 오늘은 유독 많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하며 길도 설명해주고
'비엔~비엔~' '부엔 까미노!'하며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처음에는 일일이 인사하는 것도 쑥스럽고 까미노 인사도 영 어색하더니
이젠 한 마디 한 마디가 고맙고 힘이 된다.
# 자전거도로와 같이 있는 아스팔트라 걷기가 좀 수월하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길이 나 있다면 좋을텐데'
잠시 얄팍한 생각을 해본다.
시속 4km였던 보통 때와는 달리 오늘은 거의 시속 6km다.
공원이 나와 잠시 벤치에서 쉬고 있는데
할아버지 3인방이 오셔서는 내 앞에 자꾸 화살표를 그리신다.
'네~네~' 하는데 자꾸만 뭘 설명하신다.
내가 스페인어를 영 알아듣지 못하니
갑자기 길가에 핀 민들레꽃을 꺾어와 화살표 위에 떨어뜨려 놓으신다.
민들레(diente de león), 민들게, 민들레. 자꾸자꾸 강조하신다.
그리곤 세 분이 민들레 놓인 화살표에 서서는 박자맞춰 행진하신다ㅋ
'아~ 노란색 화살표만 잘 따라가란 뜻이구나~.'
계속 길을 가다 공원을 벗어났는데 역시 화살표가 없다.
대신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길 양 옆으로 노랗게 얼굴을 내민 민들레가 한가득~
민들레만 보고 따라가라는 뜻이었나보다.
세 분의 뜻깊은 마임을 그제서야 이해했다.
노란 화살표, 민들레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 4km를 남겨두고 여유롭게 가는 길, 아무도 없는 산골이다.
내가 정말 시골에 왔구나 생각하며 부지런히 걷는데
길가에 지프차 한 대가 서 있다. 옛날 서부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차다.
사진을 찍을까 하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아 그냥 지나쳤다.
할아버지들이 일러주신대로 민들레를 보며 걷는데
한참 후 그 차가 내 앞으로 슝~ 지나간다.
쭉 가는가 싶었는데 저만치 앞에서 차를 돌려 이쪽으로 다시 온다.
'취하셨나;;'
좀 이상하다 싶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휙 지나치려는데 차가 내 앞에 끽- 멈춰선다.
흰 수염이 난 운전자가 창문을 열고 인사를 건넨다.
뭐라고 얘기하는데 어딜가는지 묻는 것 같았다.
포베냐로 간다고 대답하곤 계속 길을 가려 돌아섰다.
그랬더니 웃으며 자기 차에 타란다.
자꾸 손짓하며 조수석 문까지 열어준다.
까미노 중 히치하이킹을 하거나 마을 사람들이 차로 데려다 줬단 얘기를 심심찮게 들은터였지만
길을 잃은 것도 아니고 몇 km남지 않은 터라 그냥 가겠다고 했다.
무엇보다 아까 길가에 멈춰있던 차가 갑자기 길을 돌려 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운전자는 계속 탈 것을 권하더니
내가 극구 사양하자 급기야는 차에서 내리려는 것이다.
덜컥 겁이나 잰걸음을 옮기려는데 차가 내 앞을 막아선다.
길 옆으로 잽싸게 빠져나왔다.
몸을 휙 돌려 발걸음을 성큼성큼 내딛었다.
일부러 스틱을 바닥에 탕탕 찍으며 걸었다.
막 다급하게 소리치길래 힐끗 뒤를 돌아봤다.
차에서 내려서는 속옷까지 다 내린 채 이쪽으로 막 오고 있는게 아닌가.
악마같았다.
순간 너무 놀라 앞만 보고 힘껏 내달렸다.
어깨를 짓누르던 가방과 발을 괴롭히던 물집, 다리통증은 다 잊은 채 한 가지만 생각했다.
'제발 이 길 무사히 벗어날 수 있게 해주세요'
숨이 턱까지 차서는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옷이 땀으로 다 젖었지만 무섭단 생각도, 힘들단 생각도 없었다.
아니, 그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오직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전속력을 다해 걸었다.
1km정도 남았을까.. 마을에 가까워졌단 생각이 들었다.
길가에 있는 집 앞에 한 가족이 모여 있다.
꼬마 아이와 어머니가 인사를 건넨다.
아직은 모두를 경계해야 할 것만 같다.
늘 하던 인사인데 웃는게 영 어색하다.
빨리 인사를 하곤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아주머니가 날 부른다.
순간 잔뜩 움츠러든다.
'이건 또 뭐지,,,' 괜히 초조하다.
아주머니는 "잠깐만~" 하더니 집 안으로 들어가시고
꼬마가 손바닥을 보이며 기다리란 시늉을 한다.
다른 가족들이 이것저것 묻는데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인지 관심이 별로 달갑지 않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아주머니 손에는 큼지막한 사과가 들려있다.
내 손에 꼭 쥐어주시며 길을 가다 먹으라며 어깨를 두들기신다.
꼬마는 또 냠냠 먹는 시늉을 하며 통역을 돕는다.
얼떨떨해져서는 감사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왜 하필 너니..'
사과를 받으니 기분이 묘하다.
물끄러미 쳐다보다 한입 콱 베어물었다.
'그래, 사과한단 의미로 받아들이겠음.'
# 알베르게에 가까워지자 해안가가 나왔다.
맥이 탁 풀려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사히 넘겼으니 됐어. 아무렇지도 않은거야. 괜찮아.'
아침부터 참 다사다난했던 하루다.
파도치는 것을 보며 마음을 다독인다.
'너무 묶여있지도, 너무 풀어지지도 말자.'
바닷물에 신발을 씻으며 또 한번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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