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는 순간 '윽' 소리가 절로 났다.
설마 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몸 전체가 큰 근육 한 덩이로 뭉친 느낌이다.
기지개를 조심스레 켜보다 그만 찌르륵 하고 쥐가 났다.
다리를 주무르는 둥 마는 둥 하곤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다.
한 발짝도 못 움직이고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하나 둘 떠나고 알베르게엔 나만 남았다.
스틱에 의지해 겨우 일어난 뒤 알베르게를 빠져나오는데 호스피탈레로 엘비라가 불러세운다.
내 상태를 보더니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엘비라는 스페인어로 나는 영어로 얘기하는데 서로 알아듣는 게 신기하다.
중간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할 것 같다고 얘기하자 온다로아로 가서 마르키나행 버스를 타야한단다.
행운을 빈다며 꼭 안아주는 아줌마.
비쥬하고 헤어진 뒤 뒤뚱뒤뚱 걸어 20분만에 버스타는 데 도착했다.
# 한 아저씨의 도움으로 종점에 내려 마르키나(Markina)행 버스를 탔다.
근데 한참을 달려 뭔가 이상하다 싶어 기사님께 물었더니 지나쳤단다ㅠ
아침부터 이 마을 저 마을 방황했다.
어렵게 도착한 마르키나엔 인포센터도 없고 알베르게도 닫았다.
세나루사까지는 7km라니 오늘은 이만큼이라도 걷기로 했다.
물어물어 겨우 출발한 것이 12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이게 웬 돌산이냔 말이다.
숲 속을 헤치고 초원을 지나 계곡을 건너 목장에 다다랐다.
소, 양, 말, 당나귀 등 온갖 동물들이 헥헥거리며 올라오는 순례객들을 굽어보고 있다.
# 한참을 걸어 동화같이 예쁜 마을에 도착했다.
세나루사 알베르게로 짐작되는 큰 성당으로 앞으로 갔다. 문이 굳게 잠겨있다.
물어볼 사람을 찾는데 저기서 반바지 교복에 베레모를 쓴 미소년이 인사를 건넨다.
영화에서 보던 유럽 시골마을 소년같다.
길을 묻자 의젓하게 설명하더니 길목까지 안내해준다.
어쨌든 결론은 여기가 아니란 얘기다;;
# 이어진 숲길엔 아무도 없고 적막 뿐이다.
이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덤불이 우거져있다.
가시풀이 자꾸만 스틱에 엉긴다.
곧 괴물나무로 쭉쭉 커지면서 다리를 옭아맬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고 힘껏 소리쳐도 아무도 들을 것 같지 않은 이 곳,
문득 어제 동행한 시끌벅적 스페인 친구들이 생각난다.
지금쯤 수다스럽게 마르키나로 걸어오고 있겠지?
정신력으로 버텨 올라온 곳에는 수도원 같은 성당 하나가 떡 하니 자리잡고 있다.
# 좀 무서운 인상의 신부님이 들어오셔서는 이것저것 설명해주신다.
내가 스페인어를 영 못 알아듣는 것 같자 그림으로 그려 설명해주신다:)
성당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아늑하다.
벌레가 좀 있긴 하지만 어제처럼 모기가 눈을 밤팅으로 만들어놓지만 않는다면 괜찮다.
주변 정원과 성물방 등을 둘러본 뒤 방에 있는 순례자에게 알베르게에 대해 다시 물었다.
불어와 영어로 번갈아가며 설명해주는 까트린은 척 봐도 여행 고수 느낌이다.
프랑스인 그녀는 이태리에 살며 종종 장기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깡마르고 고집있어 보이는 인상과 달리 분홍색 이불과 리본을 좋아하는 재밌는 아줌마다.
이전에 했던 몽골 여행 얘기도 들려준다.
몽골, 까미노에 오기 전 고려했던 터라 더욱 흥미진진했다.
이어 독일인 또래 둘과 일본계 오스트리아인 또래 한 명이 도착했다.
시앙스포(Sciences Po)에서 수학한다는 이 오스트리아 친구는 처음 봤을 때 한국인이나 일본인 인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것이 동양인 체형에 눈만 서구적으로 생겼다;;
각각 의학과 경제학을 전공하는 독일 친구 둘은 방학을 이용해 잠깐 걷는다고 했다.
방에서도 밖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숨소리도 안 나게 조용한 이 독일 친구들...
식사 때 까트린이 아니었으면 무서운 시간이 될 뻔 했다.
# 크레덴시알에 세요를 찍어주러 다른 신부님이 오셨다.
장난기 어린 눈빛의 신부님, 나를 보더니 다자고짜 헤드락을 건다;;; 이건 무슨;;;
만나자마자 순례자들에게 뽀뽀세례를 퍼붓는 거친 신부님이다.
페레그리노(남자 순례자)들에겐 포옹만^^;;
다른 한국인 순례자가 놓고 간 기념품도 내게 자랑하시고
바스크어와 다른 언어의 차이, 바스크 지방의 특색, 인생사 등을 구구절절 얘기하신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면 '바스크인'이라 대답하신다는 게 인상깊었다.
처음엔 다들 관심있게 듣고 얘기하더니 신부님의 역사 얘기가 길어지자 두 명은 먼 산보며 딴청이다ㅋ
다들 잠깐의 시에스타를 즐긴 뒤 카레를 넣은 닭고기야채수프로 모처럼 따뜻한 저녁을 먹었다.
말그대로 영혼을 위한 닭고기수프다:)
해가 지고 더 고요해진 성당 주변을 산책했다.
이런 평화로움, 고요함. 내가 여기에 온 이유였는데 순간 아무것도 생각하기가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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