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Camino de Santiago-del Norte

#4. 영혼을 위한 닭고기수프 (Deba-Zenarruza : 29.53km)

yurinamu 2010. 10. 16. 16:37

 

 

 

# 일어나는 순간 '윽' 소리가 절로 났다.

설마 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몸 전체가 큰 근육 한 덩이로 뭉친 느낌이다.

기지개를 조심스레 켜보다 그만 찌르륵 하고 쥐가 났다. 

다리를 주무르는 둥 마는 둥 하곤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다.

한 발짝도 못 움직이고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하나 둘 떠나고 알베르게엔 나만 남았다.

 

스틱에 의지해 겨우 일어난 뒤 알베르게를 빠져나오는데 호스피탈레로 엘비라가 불러세운다.

내 상태를 보더니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엘비라는 스페인어로 나는 영어로 얘기하는데 서로 알아듣는 게 신기하다.

중간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할 것 같다고 얘기하자 온다로아로 가서 마르키나행 버스를 타야한단다.

행운을 빈다며 꼭 안아주는 아줌마.

비쥬하고 헤어진 뒤 뒤뚱뒤뚱 걸어 20분만에 버스타는 데 도착했다.

 

 

# 한 아저씨의 도움으로 종점에 내려 마르키나(Markina)행 버스를 탔다.

근데 한참을 달려 뭔가 이상하다 싶어 기사님께 물었더니 지나쳤단다ㅠ

 

아침부터 이 마을 저 마을 방황했다.

어렵게 도착한 마르키나엔 인포센터도 없고 알베르게도 닫았다.

세나루사까지는 7km라니 오늘은 이만큼이라도 걷기로 했다.

 

물어물어 겨우 출발한 것이 12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이게 웬 돌산이냔 말이다.

숲 속을 헤치고 초원을 지나 계곡을 건너 목장에 다다랐다.

소, 양, 말, 당나귀 등 온갖 동물들이 헥헥거리며 올라오는 순례객들을 굽어보고 있다.

 

 

 

 

# 한참을 걸어 동화같이 예쁜 마을에 도착했다. 

세나루사 알베르게로 짐작되는 큰 성당으로 앞으로 갔다. 문이 굳게 잠겨있다.

물어볼 사람을 찾는데 저기서 반바지 교복에 베레모를 쓴 미소년이 인사를 건넨다.

영화에서 보던 유럽 시골마을 소년같다.

길을 묻자 의젓하게 설명하더니 길목까지 안내해준다.

어쨌든 결론은 여기가 아니란 얘기다;;

 

 

 

 

# 이어진 숲길엔 아무도 없고 적막 뿐이다.

이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덤불이 우거져있다.

가시풀이 자꾸만 스틱에 엉긴다.

곧 괴물나무로 쭉쭉 커지면서 다리를 옭아맬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고 힘껏 소리쳐도 아무도 들을 것 같지 않은 이 곳,

문득 어제 동행한 시끌벅적 스페인 친구들이 생각난다.

지금쯤 수다스럽게 마르키나로 걸어오고 있겠지?

정신력으로 버텨 올라온 곳에는 수도원 같은 성당 하나가 떡 하니 자리잡고 있다.

 

 

 

 

# 좀 무서운 인상의 신부님이 들어오셔서는 이것저것 설명해주신다. 

내가 스페인어를 영 못 알아듣는 것 같자 그림으로 그려 설명해주신다:)

 

성당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아늑하다.

벌레가 좀 있긴 하지만 어제처럼 모기가 눈을 밤팅으로 만들어놓지만 않는다면 괜찮다.  

주변 정원과 성물방 등을 둘러본 뒤 방에 있는 순례자에게 알베르게에 대해 다시 물었다. 

불어와 영어로 번갈아가며 설명해주는 까트린은 척 봐도 여행 고수 느낌이다. 

프랑스인 그녀는 이태리에 살며 종종 장기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깡마르고 고집있어 보이는 인상과 달리 분홍색 이불과 리본을 좋아하는 재밌는 아줌마다.

이전에 했던 몽골 여행 얘기도 들려준다.

몽골, 까미노에 오기 전 고려했던 터라 더욱 흥미진진했다.   

 

이어 독일인 또래 둘과 일본계 오스트리아인 또래 한 명이 도착했다.

시앙스포(Sciences Po)에서 수학한다는 이 오스트리아 친구는 처음 봤을 때 한국인이나 일본인 인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것이 동양인 체형에 눈만 서구적으로 생겼다;;

각각 의학과 경제학을 전공하는 독일 친구 둘은 방학을 이용해 잠깐 걷는다고 했다.

방에서도 밖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숨소리도 안 나게 조용한 이 독일 친구들...

식사 때 까트린이 아니었으면 무서운 시간이 될 뻔 했다. 

 

 

# 크레덴시알에 세요를 찍어주러 다른 신부님이 오셨다.

장난기 어린 눈빛의 신부님, 나를 보더니 다자고짜 헤드락을 건다;;; 이건 무슨;;;

만나자마자 순례자들에게 뽀뽀세례를 퍼붓는 거친 신부님이다.

페레그리노(남자 순례자)들에겐 포옹만^^;; 

다른 한국인 순례자가 놓고 간 기념품도 내게 자랑하시고

바스크어와 다른 언어의 차이, 바스크 지방의 특색, 인생사 등을 구구절절 얘기하신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면 '바스크인'이라 대답하신다는 게 인상깊었다.

 

처음엔 다들 관심있게 듣고 얘기하더니 신부님의 역사 얘기가 길어지자 두 명은 먼 산보며 딴청이다ㅋ 

다들 잠깐의 시에스타를 즐긴 뒤 카레를 넣은 닭고기야채수프로 모처럼 따뜻한 저녁을 먹었다. 

말그대로 영혼을 위한 닭고기수프다:)

 

해가 지고 더 고요해진 성당 주변을 산책했다. 

이런 평화로움, 고요함. 내가 여기에 온 이유였는데 순간 아무것도 생각하기가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