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Camino de Santiago-del Norte

#2. 아로즈 콘 레체 (San Sebastian-Zarautz : 22.72km)

yurinamu 2010. 10. 15. 17:29

 

 

 

# 이렇게 단체로 코 고는 것은 처음 봤다. 

소리도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데시벨이다.

뒤척이다 일찍 출발하기로 하고 조심히 일어났다. 

불을 맘대로 켤 수도 없고 씻는 것도 신경쓰인다. 

자꾸만 원형을 유지하려는 침낭과 한바탕 사투를 벌이며 짐도 겨우 쌌다.

 

 

# 오전 7시 40분,

알베르게를 나서며 배낭을 메는데 순간 몸이 기우뚱~ 한다. 너 원래 이렇게 무거웠니ㅜ 

뒤로 넘어갈뻔 했다. 프랑스인 아저씨가 깔깔거리고 웃는다. 아침부터 몸개그다.

어제 맨소래담도 빼고 시사잡지도 뺐는데... 더 버릴 게 없나 곰곰이 생각한다.

 

 

 

 

# 화살표가 안 보며 멈칫 할 땐 신기하게도 누군가 나타나 알려준다.

오늘은 산길이 주가 될 거라 해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는데 뭐 생각보다 가뿐했다.

'이 정도 갖고 힘들다니, 훗'

시건방을 떤지 2시간이 지났을까. 가방을 던져버리고 싶은 욕구가 불쑥 불쑥 올라온다.

점점 힘에 부쳐갈 때쯤 물을 안 갖고 온 것이 생각났다.

어제 저녁을 건너뛰느라 장 보는 걸 깜박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물을 잊어버리다니ㅠ

 

입이 바싹 바싹 말라 탈수현상이 몸으로 느껴질 때쯤, 사진에서 보았던 그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천사같은 할아버지께서는 이 구간에 세요와 물, 과일을 놓아두고 지친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일단 세요고 뭐고 수돗물이라도 마셔야 했다. 500ml 물 한병을 원샷-

정신줄을 잡은 뒤 할아버지와 사진도 찍고 개도 한번 쓰다듬어 주곤 다시 일어섰다.

 

 

 

 

# 마들렌느로 아침을 때울 곳을 찾아보았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에서 누가 치즈를 잘라 아침을 먹고 있다.

지난 산세바스티안 알베르게에 같이 묵었던 독일친구다. 

이번 까미노가 2번째란다. 작년엔 프랑스길을 걸었고 올해는 빌바오까지 걷는단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이 왜 이렇게 까미노에 많이 오냐고 묻는다. 난 아직 한 명도 못봤는데;;

까미노 카페에서 예상질문으로 꼽힌 문제라 쉽게 대답했다.

그 밖에 까미노 동기, 미래 계획, 남북한 문제 등이 출제됐다.

 

화살표를 한참 따라가니 주차장을 가리킨다. 

이 친구는 독일인들의 까미노 바이블인 노란책에 정보가 나오지 않자 더욱 당황한다.

뒤따라오던 2명의 일행도 덩달아 방황한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할 수 없이 왠지 길인 것 같은 길로 간다.

조금 더 걸으니 화살표가 나온다.

이런 게 북쪽길 스타일인가보다.  

  

 

 

 

 

# 오늘은 진흙길, 산길, 아스팔트를 모두 지나며 산과 바다, 들, 초원을 모두 보았다.

동물도 꽃도 모두 슈퍼사이즈다. 수국이 무섭긴 처음이다.

 

 

# 거의 정신이 흐릿해질 때쯤 오리오에 도착했다.

인포센터에 물으니 알베르게는 이미 지나쳤단다. 심지어 슈퍼는 닫았단다.

할 수 없이 식당에 들러 처음으로 Menu del dia를 주문했다.

메뉴 중 아는 단어가 들어간 음식으로 골랐다.

 

물을 마시며 기다리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식당과 옆 카페에 앉은 모든 주민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빙그레 미소를 보내주지만 식사하는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민망했지만 음식이 나오니 개의치 않는다.

 

샐러드에 토마토가 잠길 정도로 올리브유가 부어져 있다.

혹시 잘못 부었나 싶고;; 느끼할 것 같았는데;;

바게트로 살짝 찍어 맛을 보니 너무 맛있다*.* 

기름에서도 이렇게 신선하고 고소한 맛이 나는구나 싶었다. 

남길 줄 알았는데 바게뜨로 올리브유까지 다 찍어 먹었다ㅋ 

직접 만든 라자냐도 일품이다.

어제 점심, 저녁, 오늘 점심까지 세 끼를 한꺼번에 먹는 느낌이다.

디저트로 카페콘레체를 택했는데 이상한 게 나왔다.

이게 머지??;;;;;;;;;;

알고보니 메뉴 고를 때 '콘 레체(con leche)'만 보고 'Arroz con leche'를 카페로 착각한 것;;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ㅜ 스푼으로 떠보니 밥이 들어있다 헉;;

한 스푼 맛보고 그만 나왔다...

 

 

 

 

 

 # 저녁을 안 먹어도 될 것 같은 상태로 또 다시 걷기 시작한다.

산길 산길 또 산길..

화살표 없는 곳으로 가 살짝 해안길을 타보려 했으나,

혜성같이 나타나 잡아주신 스페인아저씨 덕분에 험준한 산을 또 타게 되었다.

거의 바닥에 붙어 2시간을 걸었다.

 

알베르게에 쓰러지다시피 도착, 4시 반이 좀 넘었다.

오늘은 유난히 당황스러운 일이 많았다.

아로즈콘레체 같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