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Camino de Santiago-del Norte

#3. Encantada! (Zarautz-Deba : 21.55km)

yurinamu 2010. 10. 16. 12:21

 

 

 

# 알베르게를 나서니 7시 50분이다. 어째 조금씩 게을러지는 느낌이다.

해안길을 쭉 따라가는데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아침에 이렇게 반짝이는 바다를 보며 조깅하는 사람들...

 

넋을 놓고 한참을 가는데, 그러고 보니 노란색 화살표가 없었다.

바닷길만 따라오느라 놓친건가?

잠시 주춤하는데, 어떤 아줌마가 나를 붙잡곤 스페인어로 뭐라뭐라 설명하신다.

"&##$%, #$%^&*&^$%&^*!!"

 

아주아주 열심히 말씀해주시는데.. 무척 감사한데.. 내겐 외계어다ㅠㅠ

죄송하고 무안한 마음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아줌마의 역동적인 손동작과 눈에서 나오는 빔을 주목했다.

"산티아고 가지? 이 길은 화살표가 원래 없어.

걱정말고 이 해안을 따라 쭉 가다보면 수마미아가 나올거야."

 

어림짐작으로 해석하고 재차 영어로 물었다. 확인차:) 

오! 아줌마도 알아들으셨다ㅋㅋ

여기서 이렇게 두리번 거리는 순례자들을 많이 보셨나보다. 

가는 내내 멍 때리면 다른 사람이 나와 도와주고,

잘못 들어서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설명해주는 사람이 많았다.

 

 

# 11시 반, 생각보다 일찍 수마미아에 도착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 쉬어갈 겸 바에 들어갔다. 카페인이 절실한 지금이다. 

카페콘레체로 기운을 차리고 과일가게에 들러 오렌지 하나와 천도복숭아 하나를 샀다.

지금 생각해보니, 과일가게 들어가면 비닐장갑부터 찾는 버릇이 여기서 들었나보다.

 (스페인에선 과일 고를 때 비닐장갑을 끼거나 주인에게 말해야 한다는 걸 그 때 알았다ㅋ)

 

 

 

 

 

# 다시 Itziar로. 무척 가파르다는 말은 들었지만 너무 심하다ㅠ

옆은 바다, 다른 옆은 산길이라 경치는 훌륭했지만 힘들면 다 부질없다ㅋ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해서 오렌지를 꺼내는데 달콤한 향에 벌이 달겨든다. 

나눠 먹는 건 괜찮은데 손과 입 주변으로 오는 건 좀 무섭다;;

여긴 벌도 크다.

붕~ 하고 마주 오던 왕벌이 제 몸뚱이로 내 볼을  툭 치고 지나간 후론, 벌을 보면 썩 유쾌하지 않다.

남은 오렌지를 입에 넣고 물티슈로 닦았지만 여전히 손은 찐득찐득하고 쓰레기는 처치곤란이다. 

지나올 땐 쓰레기통도 많더니 꼭 찾으면 없다.

껍질을 비닐봉지에 돌돌 싸서 배낭 윗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배낭을 매고 일어섰다.

 

계속 길을 가는데 자꾸만 귓가에서 부웅~부웅~ 소리가 난다. 벌이다.

아까 거기서부터 따라왔나보다. 배낭 윗주머니에 넣은 오렌지껍질이 원수같다.

잠시 멈췄다가 다다다다 내달렸다.

무겁고 불편한 오렌지는 까미노푸드론 적당하지 않다.

맛있지만 순조로운 고행길을 위해 당분간 안녕이다.

 

 

 

 

# 물도 다 떨어져가고 체력도 바닥을 드러낼 때쯤,

산중턱에서 4명의 친구들이 휴식을 취하는게 보인다. 

여느 때처럼 '올라~ 부에노스디아스!' 하고 가려는데

여자 애가 통성명이나 하자며 날 부른다.

 

스페인인 크리스티나와 산 미구엘, 영 맨(이렇게 불러달라고 해서 별명밖에 생각이 안 난다;;),

그리고 독일인 마틴.

미구엘과 마틴은 나와 동갑이고 크리스티나는 서른 언저리라고 소개했다.

영 맨은 그저 젊어보인다고 얘기해달란다.

분위기가 참 정신없었다.

 

내 물병을 본 크리스티나와 마틴이 울상이다.

'이걸 갖고 어떻게 여길 올라왔냐'며 서로 1L짜리 자기 물병들을 들고 온다.

내 물병을 열어선 물을 꽉 채워준다.

그리고는 빵에 하몬을 끼워 내 입에 물리고는 쵸리소를 잘라 맛보여 준다.

스페인 전통 소시지라는 설명도 빠뜨리지 않는다.

마틴은 에너지를 내기 위해 단 것도 먹어야 한다며 사과를 잘라 대기하고 있다. 

영 맨은 선글라스를 벗어 동안을 확인시켜주겠다고 깜짝쇼를 준비하고 있고

미구엘은 '반가워'가 불어로 뭐지, 뭐지 하며 중얼거린다.

(스페인어 대신 영어와 불어만 할 줄 안다고 했더니 강아지처럼 내 주변을 맴돌며 계속 이러고 있다.)

 

정신없는 자기소개시간이 끝나고 다시 갈 채비를 했다.  

최고조에 달한 다리통증 때문에 천천히 걸어야 할 것 같아 4명이 앞서가도록 했다.

미구엘은 나와 같이 가겠다며 일행과 떨어졌다.

스페인 특유의 억양이 섞인 영어로 더듬더듬 말한다.

"I like montagne." 산이 좋아서 왔단 얘기를 4번째 하는 중이다.

자긴 뭘 하는지, 자기 누나와 형은 무슨 일을 하는지, 몇 살인지까지...   

지치지도 않고 계속 묻는다.

'스페인 예쁘지?' 

'우리나라 사람들 친절하지?' 

'나도 그런 것 같지?'

 

경사가 점점 가팔라진다. 

얼굴은 벌개지고 다리는 후들거린다.

옷도 땀으로 다 젖었다.

 

반면 미구엘은 멀쩡하다.

라디오를 튼 듯 쉼없이 얘기하면서 긴 다리로 성큼성큼 산길을 오른다.

10m가더니 돌아본다. "힘들어?" 

또 10m가고 돌아본다. "물 줄까?" 

다시 10m가고 돌아본다. "배고파?"

힘이 부친 내가 속도를 못 내니 먼저 간 스페인 친구들이 신경쓰인다.

미구엘에게 친구들 따라 먼저 가라고 손짓했다. 

좀 앞서 가는가 하면 울타리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다.   

난 힘들어서 천천히 가겠다고 3번은 더 말했더니 그제야 알았다고 하며 앞장선다.

그런데 앞에서 차만 지나가면 다시 뒤를 돌아보며 뛰어내려와 소리친다.

"오른쪽으로 붙어~ 오른쪽으로~!!"  

 -.-;;;;;

 

 

 

 

 

# 어깨를 짓누르는 통증을 견디며 기다시피 데바에 도착했다.

바스크 지방이라 그런지 마을 분위기가 뭔지 모르게 독특하다.

건물 곳곳에 쓰인 문구에서도 이들만의 색깔이 묻어난다.

축제 기간이라 저마다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노래를 부른다.

광장에서는 폭발음 같은 축포 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오늘 일찍 자긴 틀렸다.

 

 

# 알베르게에 가니 스페인 친구들이 열렬히 환영해준다.

이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정신없이 오지 않았으면 오늘 5시 안에 도착하진 못했을거다.

 

씻고 발을 들여다보니 물집투성이다.

뒷축은 쓸려서 살갗이 벗겨졌다.

크리스티나가 와서 보더니 자기가 물집을 치료해주겠단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치료해준 후 나았다며 나를 안심시킨 뒤 장비를 가져온다.

수술용 장갑을 끼더니 실, 바늘, 소독약, 라이터까지 내놓는다.

정말 치료하기 위한 모든 걸 갖췄다.

 

미구엘과 마틴, 프랑스 아저씨 3인방까지 모두 에워싸고 내 발을 들여다본다. 구경났다. 

영 맨은 그 와중에 막가이버칼을 가져온다. 이걸로 해야 낫는다며^^;;

그러고 보니 영 맨 발목에 한자문신이 눈에 띈다. '愛家' 

응? Love House?ㅋ

뜻을 몰랐단다. 뜻과 음절을 알려주니 몹시 좋아한다ㅋ

 

전문의 크리스티나의 집도하에 물집 치료를 마치고 무릎엔 통증완화크림을 바르니 한결 낫다.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소한 것 하나까지 도움을 준 크리스티나가 너무 고마웠다.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발을 붙잡고 침대에 앉아 물집을 치료 중이다.

몇몇은 몸을 가눌 힘조차 없는지 바닥에 널브러지고 몇몇은 볼타렌을 바르며 근육마사지 중이다. 

 

알베르게 풍경이 마치 전쟁터 부상병동 같다.

나도 땅땅해진 다리근육이 좀 걱정되긴 하지만 내일은 제발 오늘보다 나아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