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만 보고 선뜻 집어 든 책이다. [동물농장]과 [1984]로 익히 알려진 작가지만 사실 그가 쓴 르포르타주는 다소 생소했다. 하지만 [버마 시절]이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서도 보듯 그는 창작이라기보다 취재에 가까운 저서를 몇 발표한 바 있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도 그렇다. 1936년 한 진보단체로부터 제의를 받아 대공황기이던 당시 대량실업으로 고통받는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실상을 담은 책이다.
그는 실제로 탄광지대에서 지내며 광부들의 외양, 하는 일, 먹는 음식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들의 평균 노동시간이나 임금, 심지어는 한달 지출 내역까지 분석한다. 물건 하나, 옷가지 하나에서도 노동자들의 땀냄새나는 생활이 느껴질 정도로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기록했다. 다행히 그렇고 그런 이념서가 아니라서 읽는 내내 비교적 일관되게(?)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영향력있는 작가지만 사회에 대한 이념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거나 이론적으로만 분석하려했다면 별로 와 닿지 않았을 것 같다. 노동자들이 묵는 집에서 직접 그들과 생활하며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메세지를 전달하려 했다는 것은 분명 작가로서도 높이 평가할만한 태도이며, 개인적으로는 무척 탐나는 소재와 자질이다.
'대단하다'라고 느꼈던 또 한 가지. 조지 오웰은 세상을 내다보는 탁월한 눈을 가졌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느낀 것을 바탕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분석한 대목을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 놀라움은 저자의 [동물농장],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었을 때와 같았다. 올해 1월 21일이 조지 오웰이 세상을 떠난 지 60주기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내다 본 수 년의 미래에서 우리는 그가 그렸던 모습대로 살고 있다.
<모든 기계적 진보는 점점 더 효율을 추구하며 결국엔 '아무 흠도 없는' 세상을 지향한다. 그러나 물리적인 위험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육체적 용기가 남아 있기 쉬울까? 그것이 '가능하긴' 할까? (중략) 아마도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이를테면 용기를 기르기 위해 인위적인 위험을 만들어내고, 아무 쓸모도 없을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 아령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기계적 진보의 경향은 환경을 안전하고 편하게 하는 것인데, 정작 거기 사는 사람은 자신을 용감하고 강인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다. 앞으로 맹렬하게 돌진하는 동시에 뒤로 절박하게 물러나려고 하는 꼴이다.>
- 유토피아의 주민들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놀랍도록 닮아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더 극한의 상황으로 자신을 내던지고 내모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대학생들에게 6개월 어학연수나 20일동안 10개국을 돌아다니는 80년대 배낭여행은 더 이상 성에 차지 않는다. 대장정, 오지탐험, 국토횡단 등 정도는 되어야 아무개는 용기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젊은 순례자들이 산티아고를 부쩍 찾는다고 한다. 특유의 '나도'심리와 '남만큼'오기가 작동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만큼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아봐야 자신을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여유가 생기며 용기를 시험해볼 수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모쪼록 저자는 여간해선 인정받기 어려운 팍팍한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을, 자기가 자기를 인정해주기 위한 '보상의 고행길'이 저마다 주어지리란 것을 수년 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근육전성시대인 요즘 헬스장에서 지방과 열의를 불태우는 것조차 그에게는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는 이따금 실업문제를 개선하지 않는게 일종의 '빵과 서커스'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그보다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말하자면
시장을 확대할 필요가 있는 제조업자들과 값산 고통 완화제가 필요한 배고픈 사람들의 형편이 그럭저럭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본문 중)>
*빵과 서커스: 정치인들이 강권으로 대중을 억압하기보다는 지지를 얻기 위해 베푸는 하찮은 물자와 오락에 대한 고전적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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