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 propre pensée

나의 파리

yurinamu 2015. 11. 16. 07:16



# 좀처럼 햇볕을 보기가 힘든 나날이었다. 

며칠 째, 아니 몇 주 째 찌푸린 날씨가 계속되고 부슬비가 끊임없이 내려 공기가 무겁다 느낄 정도였다.

밖에 내놓아도 빨래가 안 마르는 건 둘째치고, 겨울용 신발을 꺼내려 신발 박스들을 헤집었을 때 그 참담한 광경이란...

습기가 다 가죽 신발에 가서 달라붙었는지 흰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있었다.


놀라서 박스를 다시 닫고는 이 나라에서 '물 먹는 하마'를 파는 걸 본 적이 있던가 생각했다. 

몸과 마음을 중무장하고 신발을 하나하나 꺼내 말끔히 닦았다. 

온 동네를 뒤져서라도 제습제를 구해오리라.


# 약속은 오후 5시이니 그 전에 답사를 마쳐야 했다.

집안일을 대충 마치고 몽마르트로 갈 채비를 서둘렀다. 

다음주 초 한국에서 오시기로 한 분들의 부탁으로 파리의 구석구석을 보여드려야 했다. 

대개 파리에 첫 발을 딛으면 낭만이라는 콩깍지를 쓰고 두둥실한 기분으로 와서 화려한 면면을 확인하고 싶어하지만 

현지인들의 일상에 관여하고, 그들만이 아는 핫플레이스를 알고 싶어하는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나도 콩깍지가 벗겨지기 전까지는 그랬으니까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평소에는 잘 가지도 않을 여행객 핫플레이스들의 개장시간과 입장료, 동선을 파악해야 한다. 

한 곳을 뻔질나게 드나들거나 해당 구역 주민이 아니면 모를 각종 시크릿 정보도 가능하면 첨가해야 한다.

아이폰 지도와 나침반을 켜고도 길을 잃는 사람이니 동선도 꼬이지 않게 파악하고 버스 노선, 이동 시간도 알아두어야 한다.

어제는 루브르를 답사하고 담당자를 섭외했고, 오늘은 오페라에서 몽마르트로 이어지는 길을 미리 가보기로 했다.


오페라 가르니에 역을 나오니 언제나 그렇듯 원형로터리에서 사진 삼매경인 사람들로 붐빈다.

정면에 마주한 오페라를 두고 매표소 언저리를 서성이며 시간, 입장료, 동선을 확인한다. 버스도 어떤 노선이 가장 빠르고 자주 다니는지 확인했다가 직접 타보기로 한다.

그대로 길을 가로질러 라파예트 앞에 섰다. 건물마다 사람이 꽉 찬 0층 정문을 보니 또 다시 현기증이 난다.  

안내할 동선만 확인하고 아까 봐 두었던 버스에 올랐다.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몽마르트에 도달했다. 

모퉁이를 돌아 물랑루즈 쪽으로 향하는데 이것은 데스티니. 대형 인테리어용품점이 떡 하니 보인다. 

사실 파리와 교외 지역 일대에도 띄엄띄엄 있어 갈 엄두를 못 내었던 곳인데 여기에 있다니

오늘은 네 이 놈 흰 꽃을 처치하는 날인가보다. 제습제를 손에 넣으리.

매장 안에서도 길을 잘 잃는 나지만 오늘은 원하는 물건도 눈에 잘 띈다. 

의기양양하게 스프레이형 가죽보호제도 같이 사는 여유를 부렸다. 


이 주책맞게 큰 물먹는 하마가 이미 물을 한껏 먹었나 싶게 무거웠지만 몇 시간만 참기로 한다. 

보통은 아저씨들이 들고 다니는, 매장 이름이 커다랗게 찍힌 봉투를 휘적거리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물랭루즈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니 관광객들의 설렘 가득한 목소리가 각 국 언어로 들려온다. 

아멜리에에 나왔던 그 카페는 여전히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고 맞은편엔 못 보던 베이커리도 생겼다. 

세탁소, 치즈가게, 은행, 초콜렛가게를 지나다 보니 올해 1등한 베이커리 집 앞에 다다랐다. 

아침에 먹을 바게트 하나도 사고 회전목마 앞에서 다시 길을 돌아 내려왔다. 

몽마르트 버스를 타고 한 바퀴 휙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15분을 기다렸다 버스에 올랐다. 

맨 뒷자석에 앉아 짐을 놓고 굽이굽이 마을길을 창문 너머로 구경했다. 

아이 씽씽이를 못 보고 그냥 가면 어떡하냐고 고함을 지르는 아저씨와 영문을 모르고 커브를 돌던 버스 기사 아저씨와의 언쟁이 시작됐다.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말리는 승객들로 언쟁은 10분 내에 일단락 되었다. 

잘 가나 싶었는데 앞의 트럭 기사가 길을 다 막고 운전석을 비웠다. 10여 분이 또 지체되었다. 

구비구비 돌아 포도밭을 지나 약속장소에 다다랐다. 옆 작은 공원에는 또 수상한 소포 하나가 발견되었는지 경찰들이 둘러싸고 조사중이다. 

지하철을 타건 길을 걷건 거의 매일 보는 일이니 새로울 건 없었지만 기분이 좀 묘하다. 


약속 장소에서 멀지 않은 딱 프렌치 비스트로 분위기의 어느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발치에 물 먹는 하마를 텅 하니 내려놓고 바 의자에 걸터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이 분위기가 너무 좋다고, 몽마르트가 정말 예쁜 동네라는 걸 오늘 다시 느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메트로, 언덕, 회전목마, 빵집, 카페, 건물의 벽화, 사람들의 말 소리까지 모든 게 조화로웠다.  

새삼 '파리'에 있는 기분이었다. 


균형이 잘 맞지 않아 흔들거리는 바 의자에 올라 앉아 발을 까딱까딱이며

기분이 썩 좋았다. 한참을 그렇게 여유로웠다.

어두워져서야 카페를 나와 나선형으로 된 메트로 계단을 내려갔다. 

지인은 공연장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익숙한 길로 가기 위해 중간에 내려 메트로를 갈아탔다. 


# 무거운 짐을 끌고 집에 도착하니 벌써 밤 9시였다. 

저녁을 먹고 답사로 얻은 자료들을 정리했다. 

이번 주말은 날씨가 좋다니 전시를 한 편 봐야겠다 싶어 야심찬 계획도 세웠다. 

잠자리에 들기 전 TV를 보는데 지인에게 메세지가 왔다. 메세지를 열려는데 왠 언론사 단신뉴스가 쏟아진다. 이 시간에.

모든 뉴스에 테러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다. 맞다, 아까 공연장에 간다고 했었는데....

다행히 막 들어와서 뉴스를 접했단다. 가슴을 쓸어내리려는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인질들이 잡혀있단다.

규모가 커질 것 같은 불안감에 언론사 홈페이지에 접속해 업데이트된 뉴스를 찾았다. 

계속 사건이 진행 중이고 끔찍한 현장 소식을 담은 속보들이 계속 업데이트되어 올라왔다. 

한국과 다른 나라 곳곳에서 가족과 지인들의 메세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빗발치는 안부 소식에, 무사하냐는 말에 무어라 답을 해야할 지 모를 정도로 멍해졌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파리였는데.. 갑자기 벌어진 참극에 넋을 놓고 노트북 화면만 바라봤다. 

밤이 깊어지고 새벽이 지나도록 이웃들도 불을 켰다 껐다 잠을 못 이루는 것 같았다.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지난 1월 때와도 분위기가 자못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뉴스만 보다 아침이 밝았다. 

헬기 소리와 군사용 차량인지가 무겁게 도로를 지나가는 소리만 연신 들릴 뿐,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거리에 발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하루종일 그렇게 먹먹하고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외출자제 권고가 내려지고, 모든 기관이 문을 닫았다. 당장 오늘의 일 또한 취소되었다.  

고민 끝에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에게도 메일을 보냈다. 일정을 강행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말을 쓰면서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앞으로 줄줄이 있을 일정들 또한 진행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준비한 자료와 노력, 시간은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점점 조치가 강화될 수록 상황이 실감나고, 혹 내가 아는 누군가가 저 희생자들 안에 있지는 않을까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괜찮다고 다독이며 오히려 의연했던 어제와는 달리 충격이 조금씩 피부로 와 닿았다.

주위에 안부를 다 묻고도 안도감과 함께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일부러 틀어놓은 TV를 보다가도, 괜히 청소를 하다가도 눈물이 툭 떨어졌다. 


왜.. 무엇을 위해... 이래야만 했는지

이렇게 무자비한 희생을 감내할 만큼 그들에게는 숭고한 가치였나 

지켜야 할 가치가 반인륜적이고 몰상식한 행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위적 구실일 뿐,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훗날 이 곳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역사를 어그러뜨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 왠만하면 집 밖을 나서지 말라는 경고에 일요일 아침이 밝아서야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햇살이 풍부하게 내리쬔다. 100% 유지방이 들어간 생크림처럼 햇살 함량이 높은, 요 근래 보기 드문 날이다. 

집 밖을 나와 몇 주째 테라스에 나뒹구는 낙엽들을 주웠다. 

비바람에 그렇게 마르지도 않던 나무와 땅에 납작 업드려 붙은 낙엽이 햇살을 머금고 조금은 바삭바삭해졌다. 

정말이지 야속하게 화창한 날이다. 



오늘도, 파리를 위해 기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