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 propre pensée

미니오븐의 명복을 빌어요

yurinamu 2015. 1. 31. 06:43


파리로 오면서 가장 먼저 장만한 가전제품은 

다름 아닌 미니오븐이다. 


전자레인지보다, 밥솥보다 시급한 

나의 일등 조리도구이기 때문이다.

다른 건 없어도 간단한 베이킹과 식사를 만들 수 있을만한 것이면 되었다.


미니오븐을 구하려고 매장을 샅샅이 뒤졌는데

미니오븐은 '미니'가 아니었다.....결코 작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오븐을 구한 대만친구에게 물어봤더니

여기선 '미니'의 개념이 다른 것 같다며ㅋㅋ 그냥 중형을 샀다고 했다.


인터넷을 뒤져 마땅한 세버린 미니오븐을 구했고

집에 오기 무섭게 가열차게 돌아가며 내가 원하는 것들을 만들어냈다.


아침에 매일 바게트 타르틴을 굽는 것 말고도 

키쉬, 파르시, 그라탕, 라자냐, 각종 구이, 라클렛 등등 식사류와

쿠키, 케익, 타르트 등 디저트 까지 썩 괜찮은 요리를 해냈다.

피까르에서 사 온 냉동식품도 곧잘 데워 피까르 음식에 대한 신뢰까지 높여놓았다.


가끔 위는 타고 아래는 안 익더라도

반은 타고 반은 허여멀건 하더라도 크게 원망한 적이 없다.

작은 몸집을 불살라가며 열기를 뿜어내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불조절을 잘 하지 못하는 나를 탓하곤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빵을 굽다가 그만 오븐을 태웠다.

흘러넘친 반죽이 바닥에서부터 타면서 오븐을 새까맣게 만들었다.

이틀 전에 닦았는데 하필 이 때 태울 게 뭐냐며 수세미로 벅벅 닦았다.

쭈그려 앉아 베이킹소다와 세제로 문질러댄 결과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깨끗해진 오븐을 물에 헹궈 번쩍 드는 순간, 

떨.어.뜨.렸.다....

문짝이 깨져 닫히지도 않고 아주 못쓰게 되버렸다.


어이없이 오븐과 작별할 시간을 맞게 되었다.

유작으로 바나나케익을 남긴 불쌍한 내 오븐.

신참이 곧 오겠지만 첫 미니오븐인 만큼 너는 참 각별했다고 

2년 반 동안 내 일용할 양식을 책임지느라 수고했다고 전하고 싶다. 


그나저나 신참은 원래대로라면 어제 왔어야 하는데...

이놈의 크로노포스트가 다른 지역에 배송을 해놓았으니 가져가라

열불을 지른다....

아....너란 배송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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