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너란 아이 참 끈질기구나.
고양이는 무릇 사람이 싫은 내색 하면 얼씬도 않는다던데
너는 참 굳세다.
네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잊을 수가 없다.
고백하건데, 내가 고양이란 생명체를 그리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야.
시금치 다듬고 있을 때 어떻게 들어왔는지 넌 방 한가운데 앉아있었지.
정말 접시 떨어뜨릴 뻔 했어. 그 날 오랜만에 생선 구웠는데 말이야.
합성사진인 줄 알았어. 익숙한 내 방 한 가운데 떡 하니 앉아있는 고양이라니.
너무 놀라 악 소리도 안 나오더라.
당황한 나와는 달리 넌 거실에 앉아 이것저것 구경하더라.
벽에 덕지덕지 붙은 엽서를 보고 검은 베니스 가면과 눈을 맞추고 있었지.
참으로 당당한 널 보고, 아마 이전 주인은 널 꽤나 예뻐했나보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가라고 친히 현관문도 열어줬는데 날 보던 너의 그 눈빛을 잊지 못해.
훠이훠이 손짓하는 날 보며 '너 뭐 하니'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너...
난 고양이도 강아지처럼 나가라면 나가는 줄 알았지.. 들은 척도 안 하더라?
그때 난 네가 교육을 받지 않은 길고양인줄 알았어. 말을 못 알아듣길래. 개랑 다른 줄 몰랐지 난.
꿈쩍도 않다가 내가 다가가니 테라스로 훌쩍 뛰어가서 그 좁은 창틈으로 쑥 빠져나가더라.
난 고양이가 이동할 때 발소리가 안 나는지, 몸이 그렇게 늘어나는지 몰랐어. 충격의 연속이었지.
아무튼 새로 산 커튼에 구멍낸 건 참 유감이야.
네가 양지바른 곳(나무더미)에 앉아서 날 지켜본다는 걸 알았을 때 좀 섬뜩했어.
사람은 아니지만 인기척 좀 내면 안되니... 수시로 몰래 와서 창 밖에 네 얼굴이 보일 땐 솔직히 좀 소름이 돋았어.
너의 표정이 몹시 다양하다는 것을 알고는 더 놀랐어. 다른 사람, 아니 다른 고양이 같더라.
호기심 어린 표정만 기억했는데 어떨 땐 가필드 같고. 어떨 땐 부랑아같고.
왕거미 3마리씩 문에 끼워주지 않아도 나 사냥 잘 해...
모노프리가서 내가 얼마나 사냥을 잘하는데ㅠ
게다가 싱싱하게 산 채로 넣어줘서 나 문 열 때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잖아...
그게 보은이라고 하길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고마워 할 빌미를 제공하다간 내 명이 줄어들겠구나..
매일 문 앞에서 발 모으고 기다리고
딴청 피우는 척 하면서 째려 보는 거 이젠 좀 덜 해줘서 고마워.
작년 이맘 때쯤엔 참 자주 기다렸지 아마.
쪽문만 열면 네가 있어서 퇴근 노이로제 걸릴 뻔 했어. 아오. 엄청 놀랐어.
근데 요샌 새로운 특기가 생겼더라.
그래서 부탁하건대, 자꾸 문에다 입 대고 부르지마...
냐옹냐옹 15분씩 하면 너도 목 아프잖아.
내가 이틀 이상 집에서 안 나오면 궁금한가본데 정확한 이유가 뭘까. 혹시 생사를 묻는거니?
냐옹냐옹냐옹냐옹하다 끝에 냑! 하는 걸 보면 너도 슬슬 짜증이 나는가 본데
그만큼 했으면 이제 그만 할 때도 됐는데 말이야.
점점 용감해져서 걱정이야.
자꾸 위장술 쓰려는 것 같은데 다 보여.
언제 들어왔는지 신발장에 부츠인 척 하고 앉아있더라? 아주 보호색을 띄고-
언뜻 보니 부츠가 세 개라 얼마나 놀랐던지.
옷장에 숨어들어가서 꼬리만 내놓으면 모를 줄 알았지. 숨으려면 다 숨던가.
너 생각보다 엄청 커. 거기 다 안 들어간다고.
꼬리가 삐죽 나와 있길래 순간, '내가 이런 색 가방을 산 적이 없는데..'했다가 머리가 쭈뼛 섰어.
너 땜에 네 아빠도 당황하시잖아. 매번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시고;;
왜 그르냐....
저번에 화단에서는 좀 웃겼어.
화단 창살에 눈만 가리면 너가 안 보이는 줄 아니.
범죄자 모자이크 한 것처럼 그게 뭐야...
거기서 나 지켜보고 있는 거 다 보여.
다시 말하지만 네 몸뚱이 되게 커. 안 가려진다고.
한 가지 고마운 건 있다.
불미스러운 일 있었을 때 경찰 기다리느라 내가 집 밖에 우두커니 앉아있었지.
그 때 마치 네가 경찰인 양 집 곳곳을 둘러보고 내 옆에 앉아 꼼짝않고 1시간을 기다렸잖아.
위로해주려는 의도인 거 알고 있었어. 내심 짐작하고 고마웠어.
근데 한편으론 사실 나 좀 무서웠어..
굳이 예를 들자면 너 옆에 1시간동안 호랑이가 앉아 널 지켜보고 있는 것과 비슷한 걸거야.
난 1년 반이나 지난 지금도 네가 좀 무서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딱 긴장을 한다고.
강아지는 되게 예뻐하는데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어.
한번은, 어지간히 관심 못 받는 네가 안타까워서 차라리 네가 강아지였다면 좋았을텐데 한 적도 있어.
강아지면 내가 정말정말 예뻐했을텐데. 아주 우리집에 살다시피 하게 했을거야.
매일 산책도 하고 목욕시켜주고 옷이랑 간식도 사주고 같이 놀고.
아쉽다.
그래도 나 요즘 인사는 하잖아. 나름 많이 노력하는거야.
주변에선 내가 관심을 안 보이니까 네가 다가오는 거라는데
관심을 보이면 옳다구나 더 올까봐 내심 두려워.
정말이지 내 솔직한 심정이야.
다른 건 뭐라고 안 할게. 부탁 하나만 하자.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건 삼가해줘.
여기 내 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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