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정신에는 신경증적이고, 검열관 같고, 실용적인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의식에 뭔가 어려운 것이 떠오를 때면 차단해버리곤 한다.
이 검열관은 기억이나 갈망이나 내성적이고 독창적인 관념들을 두려워하고
행정적이고 비인격적인 것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음악이나 풍경은 이 정신의 검열관이 잠시 한눈을 팔게 하는 것 같다.
# 공항의 매력이 집중된 곳은 터미널 천장에 줄줄이 매달려 비행기의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텔레비전 화면들이다.
미학적 자의식이 전혀 없는 그 모습. 노동자 같은 상자와 보행자 같은 활자는
아무런 위장없이 자신의 감정적 긴장상태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을 드러낸다.
- 저자가 '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도 밝힌 바 있듯 공항이라는 공간을 참 좋아한다.
모든 여정의 시작과 끝, 만남과 이별이 얽히고 설키는 곳이기 때문일까.
보기보다 그리 우아한 공간은 아니지만, 저자 말마따나 특별한 여정이 없더라도
가끔은 그 곳만이 지닌 설렘과 긴장을 고스란히 느껴보기 위해 찾고 싶은 곳이다.
오후 세 시. 권태와 절망이 위협적으로 몰려오는 시간.
감정에 깊은 크레바스들이 파여 있을 때,
늘 어딘가로 이륙하는 비행기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 요즘 부쩍 하늘을 올려다보는 횟수가 많아졌다.
어디론가 가는 비행기를 눈으로 좇으며 할 수 있는 건 :) 이것 뿐.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거기에 위로의 뜻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
기내식을 '파도 치는 절벽 위 치즈빵'맛 이라 했다.
치즈빵을 오렌지로 바꾸기만 한다면 그 오묘한 맛에 깊이 공감하는 바다.
그렇다고 훌륭한 맛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ㅋ
# 저 밑에는 적과 동료가 있고, 우리의 공포나 비애가 얽힌 장소들이 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지금은 아주 작다. 땅 위에 긁힌 자국들에 불과하다.
물론 이 유서 깊은 원근법의 교훈은 전부터 잘 알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차가운 비행기 창에 얼굴을 갖다 대고 있을 때만큼 이것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경우는 드물기에..(중략)
- 문득, 초등학생 때 '행성'에 관한 수업을 하던 중 지구과학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우주에는 이렇게 수많은 별이 있고 그 중 하나인 지구에 우린 살고 있어요.
지구 안에 수없이 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고, 또 우린 그 중 하나지요.
선생님은 가끔 힘들고 화나는 일이나 짜증나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생각해요.
'우주에서는 요만~한 점 하나로도 표현되지 못할 사람 때문에, 아~주 작고 보잘것 없는 일 하나 때문에 힘들어 하는구나.
세상엔 이보다 크고 중요한 게 얼마나 많은데.' 하구요. 지구과학 선생님이라 이런 게 참 좋아요^^
여러분이 나중에 어른이 되서 '내가 가장 힘들다'는 생각이 나거든 이걸 떠올렸음 좋겠어요."
# 그녀가 연인에게서 원하는 것에 대한 나의 추측은 꼭 끼는 양복에 비유할 수 있었고, 나의 진짜 자아는 뚱뚱한 남자에 비유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은 뚱뚱한 남자가 자신에게 너무 작은 양복을 입으려고 기를 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중략)
옷이 뜯어질까 두려워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앉아, 무사히 저녁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사랑 때문에 불구가 되었다.
# 석양을 본 뒤, 나중에 일기를 쓸 때는 뭔가 적당한 것을 더듬더듬 찾아보다가 그냥 '아름다웠다'고만 적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글로 고정해놓을 수가 없어 곧 잊고 만다.(중략)
삶을 붙잡아두는 데에는 감각경험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오직 선별을 할 때에만, 선택과 생각이 적용될 때에만 사물들이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다.(중략)
독자가 읽다가 이것이 바로 내가 느꼈지만 말로 표현을 못하던 것이라고 무릎을 쳐야 하는 것이다.
- 이 장은 전문가에게서 글쓰기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다보면 중간중간 걸러지고 다듬어진 표현이 '반짝'하고 보일 때가 있다.
그 표현의 근원은 분명 일상에서 오는 것인데도 미처 보지 못했던, 혹은 적당한 말(글)로 나타내지 못했던 것을 붙잡아두는 능력,
바로 이것이 그가 탁월하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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