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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이명박 라디오와 루즈벨트 라디오

yurinamu 2008. 10. 24. 18:30

 

 

[강천석 칼럼] '이명박 라디오'와 '루스벨트 라디오'

발행일 : 2008.10.17 / 여론/독자 A30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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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의 연설 가운데 가장 들을 만했던 연설을 꼽는다면 어떤 연설을 들 수 있을까. 솔직히 지금까지 대통령 연설은 당기는 맛도 밀치는 멋도 없이 그저 밋밋하기만 했다. 최악은 '청와대 뒷산에 올라 광화문 일대의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며…' 속 터지는 국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감상에 젖던 광우병 연설이었다. 지난 13일 아침 7시15분의 라디오 연설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는 그런 옛날과 달랐다.

조그만 회사의 수위로 일하며 늘 '회사가 넘어가면 안 되는데…'했다던 대통령 아버지가 아들의 연설 문(門)을 따주었다. '이명박' 하면 마음의 문부터 닫아걸던 사람 가운데 몇몇은 이 이야기에 가슴 속 사립문을 빠끔히 열어봤을지 모른다. 중간도 탄탄했다. 5만8000개의 회사가 부도로 쓰러지고, 149만 명의 가장(家長)이 실업자로 거리를 헤매던 IMF 시절, 멀쩡한 기업들이 은행 돈을 구하지 못해 고리(高利) 사채에 기대서 연명하다 주저앉고 말았던 석유파동 무렵을 돌아보는 대목에선 중소기업인과 건설업자들 가슴이 메어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조금만 도와주면 살 수 있는 기업이 흑자도산(黑字倒産)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는 대통령의 약속 아닌 약속에 한 줌 희망을 움켜쥐었을지도 모른다. '비가 올 때는 우산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는 게 대통령의 소신'이라는데 느닷없이 빌려줬던 돈을 몽땅 거둬가는 은행들도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슬며시 싹을 틔었을 수도 있다.

내년 2월 말이면 52만 명의 대학과 전문대 졸업생이 대학 문을 나선다. 그러나 올 들어 늘어난 일자리는 고작 11만 개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하나라도 더 만드는 기업이 애국자'라는 대통령의 호소가 먹혀들지 않으면 52만 명 대학 졸업생의 3분의 2는 겨울 거리를 훑고 가는 찬바람을 맞을 도리밖에 없다. 오늘도 주가(株價)는 거래소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고, 환율은 천장으로 솟구치고, 외국 언론들은 정부가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다'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한국 경제 위기론을 대문짝만한 활자로 박아내고 있다.

"내 모든 재산은 현찰로 바꿔 집 뒷마당에 묻어뒀다"는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의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불안한 시대다. 마음 둘 곳이 없는 국민들로선 '있는 사실 그대로 모든 것을 투명하게 알리겠다'는 대통령 연설을 믿어보는 것 말고 달리 길이 없다. 연설 군데군데에서 '야당에 고맙고' '국민에게 감사한다'는, 평소에는 좀체 듣기 힘들던 표현과 마주친 것도 신기했다. '감사합니다'와 '제 탓입니다'를 제때 입에 올릴 줄만 알아도 험한 세상에서 몸을 보전할 수 있다고 한다. 언젠가는 '제 탓입니다'라는 말을 듣게 될 날도 올 것이다.

유감스러운 건 대통령의 대통령다운 이 연설을 들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대통령 라디오 연설의 모델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노변정담(爐邊情談)이다. 루스벨트는 대공황의 폭풍이 수천 개의 은행과 수만 개의 기업을 무너뜨린 허허벌판에서 취임했다. 그리고 취임 1주일 후인 1933년 3월 12일 라디오 방송의 마이크 앞에 앉았다. '친구 여러분(my friends)'이란 말로 시작한 연설 내용은 이명박 대통령의 연설과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그러나 국민 반응의 강도(强度)와 속도는 크게 달랐다. 연설 다음날부터 50만 통의 전보와 편지가 백악관으로 날아들었다. '내 친구에게'로 시작해서 '당신의 친구로부터'라는 말로 끝을 맺은 게 많았다. 은행이 폐쇄되기 직전 황급히 돈을 빼갔던 사람 일부가 연설 다음날 다시 문을 연 은행에 돈을 맡기러 온 작은 기적도 더불어 일어났다.

'이명박 라디오'와 '루스벨트 라디오'의 이런 반응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TV·인터넷 시대인 2000년대와 라디오 시대였던 1930년대의 차이일까. 미국의 밤 10시와 서울의 아침 7시15분이라는 연설 시간의 차이일까. 평소 1분에 175단어에서 200단어를 말하던 속도를 국민의 이해 속도와 맞춰 분당(分當) 120단어 이하로 낮췄다는 루스벨트와 평소 습관대로 읽어 내려간 이명박 대통령 간의 라디오 다루는 솜씨 차이일까. 물론 그런 차이들도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과연 그것 때문만일까. 이명박 대통령은 이번 라디오 연설에서 '신뢰야말로 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답(答)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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